식구 중 셋은 광주에 남고
나머지 셋은 탈출 길 올라

▲ 80년 5월,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가족.

 5월18일, 그날밤 나와 친구는 도봉산자락 우이동 교수님집에 있었다. 어제부터 전국대학에 휴교령이 내렸다. 친구와 나는 교수님을 찾아 맥주잔을 놓고 앞으로의 시국을 듣고 있었다. 10시가 지날 무렵 교수님 댁 전화가 울렸다. 교수님이 이윽고 전화를 우리에게 건네 주었다.

 ‘여기 서울역이야. 광주에서 터진 모양이야. 11시 광주표 3장을 샀으니 빨리 서울역으로 와.’ 나와 친구의 1년 선배였다. 그리고 우리 셋은 19일 새벽 광주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금남로로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가 묻는다. “광주 소식 몰라요?”

 유동 입구쯤 왔을 때 멀리 군트럭들이 줄지어 있고 군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택시기사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내렸다. 동아방송 기자였던 선배와 동양통신(연합뉴스 전신)기자였던 친구는 각자 취재를 위해 금남로로 향하고 아직 군복학생신분이었던 난 양동에 있던 집으로 향했다.

 하루가 지났다. 난생 처음 눈앞에서 ‘살기’와 대면했다. 온 몸을 파고드는 공포를 느꼈다. 다리에 쥐가 난 듯 움직이질 않았다. 양동시장 다리를 가로막은 군인들이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총검과 곤봉으로 줄 세워 검문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벌어진 데모 구경(?)을 나갔다가 돌아가던 길에 그들에게 걸렸다. 트럭에는 벌써 머리에 피가 흐르는 젊은이들이 엎어져 있었다.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학생증이면 무조건 두들기고 트럭에 싣는 게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예비군 소집증이 있었다. 통과시켰다. 걸어가는 내 뒤 편으로 다시 곤봉 휘두르는 소리와 고통스런 비명이 들렸다. 돌아볼 수 없었다. 후들거리는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보성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신 아버지가 집에 와 계셨다. ‘식구들을 두 패로 나누자. 셋은 보성으로 가고 셋은 여기 남자. 모두 여기 있다가는….’ 직장에 다니는 형이 광주에 남아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기로 했다. 대학생 신분인 나와 남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보성으로 가기로 했다.

 흉흉하고 겁에 질린 소문들이 밤마다 동네를 휘감고 있었다. 군부대인 상무대와 가까운 동네부터 밤이면 가가호호 집집마다 군인들의 검색이 벌어지고 있다했다. 밤마다 출처 모를 총성들이 집 근처 광주천에 울렸다. 벌써 사상자들이 기독병원에 가득하다고 했다. 이미 광주는 봉쇄되었고 상공을 맴도는 헬기 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양동시장에선 커다란 가마솥이 걸렸다. 장작불이 피워지고 주먹밥과 음료수가 시민군들에게 날려지고 있었다. 시장 안 닭 전에서 닭 한 마리를 사왔다. 여섯 식구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점심을 했다. 근심 가득 찬 어머니를 뒤로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기찻길(경전선) 따라 보성으로 향했다. 효천을 지날 때쯤 태극기에 덮인 시신들을 실은 시민군 트럭들이 지나갔다. 광주외곽, 화순군 경계로 들어서자 헬기들이 바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듯 저공비행으로 공포를 자아냈다. 멀리서 총성들이 연달아 들렸다.

 걷고 또 걸었다. 철길에는 이미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화순군 도곡면을 지나고 있었다. 말없이 걷기만 하시던 아버지가 잠시 멈추셨다. 기적이 사라진 철길에 3부자가 나란히 앉았다. 철로의 후끈한 열기가 확 올라왔다. 그 봄은 유달리 더웠다.

 “저기 저쪽에 우리 조상님들 모시는 재각이 있다. 기축옥사(1589년 정여립 사건으로 일어난 서인의 동인 숙청. 호남 사림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이 처형 혹은 유배당함) 때 정철의 서인들한테 젖먹이들까지 멸가가 되었지만 도망가고 숨어서 간신히 이렇게 피를 이었다. 나도 인공(6·25) 때 대나무 밭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무슨 말씀을 하신지 알았다. 세상이 어지러운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아버지 나름의 교훈을 에둘러 자식들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일 게다. 날이 저물었다. 철로 건널목 옆 구멍가게로 들었다. 안쓰러운 표정의 친절한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주고, 방 하나에 흰 광목을 이불 대신 내준다. “우리 생전에 또 난리를 겪네요.” 할머니의 한숨이 들렸다.

 27일이 지났다.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딴 세상이었다. 내가 며칠 꿈을, 악몽을 꾸고 온 것 같았다. 광주는 없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악몽일 뿐이었다. 나도 잊었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광주가 살아났다. 공포가 밀려왔다.

 그날 광주행 야간 열차표를 끊었던 선배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광주에서의 취재노트를 복사해서 같은 회사 선배기자에게 주었는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끝내 꿋꿋했던 그 선배가 자랑스럽다. 그런 만큼 부끄러움도 더 커진다.

 5·18이 오면 그날이 생각나고 ‘광주’ 앞에 부끄러워진다. 양동시장 다리목에서 처절한 비명을 듣고도 차마 돌아보지도 못했던 그때의 두려움이 다시 등줄기로 흐른다. 양동시장 거리를 구수하게 채웠던 무쇠솥의 밥냄새가 어제인 듯 코끝에 어린다. 안방의 장농을 앞으로 빼내 자식들 숨을 공간을 만들던 어머니의 억센 팔이 느껴진다. 보성가는 철길을 말없이 걷고 있는 26살의 내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뵐 수 없는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 분들 앞에 다시 부끄러워진다. 오월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오월 유가족과 부상자, 그 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드린다. 무엇보다 온 시민의 오월, 2세 3세들의 오월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이병완 <서구의원·전 노무현대통령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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