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마을이 희망이다

 #79 우리들에게 응답 하소서, 혀 잘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귀먹은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요? 아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아니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동진의 마음은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은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은 나쁜 놈들이 열매를 가져가는지. 그래서 세상에 늘 불만이 있었다. `나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 지역, 학력, 신체, 남녀 빈부의 차별에 저항한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차별은 모두 척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게 살자는 건 아니다. 게임에 있어서 공정치 않은 부당한 차별을 없게 하는 것이다.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리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가슴속에 분노가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임권택 감독이 만든 서편제가 용서라는 화두로 답하고 있다.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았지요. 간밤에 한을 풀었지요. 북장단과 내가 부르는 소리로요.” “여그 온지 얼마나 되았지요?” “한 3년 되았지요. 제 팔자 생각해보면 당치도 않게 편하게 지냈지요.” “정해진 곳은 있능가?” 고개만 갸웃 “갈 곳이 정해지면 짐을 옮겨줌세.” 송화는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다시 새 길을 떠난다. 그 길이 언제 끝날 줄도 모른 채….

 “니 눈을 누가 멀게 했는지 알지야?” 고개만 끄덕 “나를 용서 했냐?” 다시 고개만 끄덕 “니 소리를 들으면 원망이 하나도 없으니, 진작 나를 용서한줄 알았다. 난 알지. 이 애비는 너의 마음을 알지. 진정한 용서, 나 아닌 너를 통해 소리를 승화 시키려 했던 애비의 마음을 알고 용서한 게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동진은 진정한 용서를 알았다. 맞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 몸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껍데기를 버린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또 슬퍼할 일이 없지. 자기가 쓸 수 있는 만큼의 돈 외에는 많은 재산이라는 것이 필요 없는데, 왜? 왜? 왜?

 정말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큰방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모여서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가끔씩 웃음소리가 거실을 지나 동진이 누워있는 구석방까지 들렸다. 어디에도 숨 쉴 곳 하나 없던 고독. 그 고독의 실체를 꺼내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던 터였다. 이상과 현실. 무어라 말하기 힘든 아내와의 대화. 꽉 막혀 숨이 넘어갈 만큼 답답해지면 집을 빠져나와 수희를 만났다. 그런 숨을 쉴 수 있게 해준 수희도 이제는 곁에 없다.

 스스로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생활을 잠시 접고 새 길을 가려는 동진의 마음은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끓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관계의 연속성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80년대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웠다면 지금부터는 이를 자라게 하는 물주기, 붓 해주기, 거름주기가 필요하다. 화학비료만으로는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래서 동네로 돌아와서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타협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마을에서 희망을 찾자.


 #80 `상추와 치커리는 농약허지 않고 천천히 길러 영양이 듬뿍 들어있네. 죽순은 끓는 물에 살짝 디처서 고추장, 식초, 깨 넣고 초무침해서 드시게. 오이장아찌는 먹기 좋게 썰어서 약 10분 정도 물에 담갔다가 참기름, 깨, 고춧가루, 풋 고추 넣고 무쳐 먹고, 두부는 국산 콩에 천연 간수만 넣어 만들었네. 유화제나 소포제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 콩 본래의 향과 식감이 살아있네. 방사 유정란은 풀을 많이 먹으면 노른자 색이 진하고 더 고소허네. 황토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풀들을 먹은 닭들이 낳은 좋은 달걀이라네. 우리 어렸을 적에 짚 꾸러미에 쌓아 장에다 팔던 그런 달걀이네. 맛있게 먹고, 고향생각에 젖어보시게.’

 아주 상세하게 적힌 친구의 쪽지를 읽고, 동진의 뇌리에 정이 듬뿍 담긴 사투리와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들이 친밀하게 다가왔다. 내가버리고 떠나온 농촌. 우리의 농촌은 그렇게 버려졌고, 오래된 동네에는 노인들만 보인다. 자연의 소리보다 더 정겨운 아이들 울음소리는 좀체 들어보기가 힘들다. 그러니 고향에서 내가 다니던 학교는 폐교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렇게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는 이미 나 있는 길옆으로 또 다른 도로를 만드느라 사방이 파헤쳐지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로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농촌은 그렇게 버려졌다. 마을의 정취는 사라져가고 빈집만 늘어난다. 우리의 뿌리인 농촌이 죽어 가면 도시도 같이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동진은 이런 현실에서 도대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걱정이다. `무엇부터 할까? 이런 어려운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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