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 지켜 줄게’

 #83 `당신 눈에 눈물 고이면, 내가 당신의 눈물 닦아줄게. 세월이 당신에게 아무리 험한 모습으로 다가 올지라도, 내가 당신 지켜 줄게.’ 동진은 이런 다짐을 했다. 이제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겠노라는.

 아내가 화장실에서 심하게 구토를 한다.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내는 변기를 붙들고 위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음식물까지 토해내는 듯했다. 문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아내의 눈은 눈물이 가득 고여 초점이 흐렸다. 동진을 본 아내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이런 아내의 아픔을 지켜보고 있던 동진은 `당신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 당신의 아픔을 함께 하겠노라’ 던 조금 전의 다짐도 모두가 헛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결국 아픔은 당신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무력감에 동진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화장실 밖에서 아내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동진의 마음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어지럽게 흩어진다.

 연탄이 떨어지고, 전기료 독촉에 아내의 눈이 토끼눈이 될 것이라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모른 척 가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동진은 이렇게 가정은 나 몰라라 하면서 일이 끝나면 수희와 술잔을 기울이며 히히덕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이런 남편이 얼마나 미웠을까? `뭔 팔자에 저런 잡놈이 내 서방이 되어서 내 속을 썩이는지. 하나님은 저런 놈 잡아가지 않고 뭐하는지 몰라’ 했을까? 이런 현실의 중압감이 동진의 가슴을 짓누른다.

 아내는 거의 반죽음이 되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다. 얼굴색이 하얗다. 동진은 이런 아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만 `미안해, 당신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워!’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내 역시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다.

 #84 잠 못 이루는 밤. 술! 술 생각이 났다. 고향 누님이 담갔다고 가져온 모과주를 술잔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톡 쏘는 알코올의 자극이 식도를 타고 비어있는 위장에 이르기까지의 세포들을 깨운다. 동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빈속을 타고 내려간 알코올은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순간 머리가 혼미해짐을 느꼈다. 동진은 주방 서랍을 여기저기 뒤졌다. 맨 아래 서랍 귀퉁이에 지난 가을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가져오신 감 말랭이가 몇 개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딱딱하게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래도 달작 지근한 맛은 더했다. 잘근잘근 씹고 또 씹는다. 동진은 그런 감 말랭이를 씹으면서 어머니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술병을 들어 벌꺽 벌꺽 위장에 담는다. 고르지 못 한 이 세상!

 분노를 마신다. 미움을 마신다. 거짓을 마신다. 마시고 또 마신다. 동진의 양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온몸이 발개지자 아픈 마음이 가만히 열린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눅눅한 거실바닥에서 가만히 누워본다.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더 멀리 달아나 버리고 자꾸만 아내와 살았던 옛일들이 떠오른다. 눈물이 소리 없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울었다.

 눈물을 흘리고 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동진은 몸을 일으켜 안방에 들어가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독한 항암 주사를 이겨내느라 3일째 토하고 온 방구석을 기어 다니며 고통을 이겨내려 몸부림을 친 아픔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 있다. `불쌍한 사람. 이 못난 사람 따라 살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 혼자 삭이다 지쳐 그 한들이 맺혀서 암 덩어리가 되었겠지. 그래도 원망하는 낯 빛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지. 그래도 당신은 그 옛날을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었지. 그래 그 때는 정말 힘이 들었지. 군에서 제대하고 방림동 단칸방 14만 원짜리 월세 방에서 첫 살림을 시작 했을 때, 아이들이 고기 먹고 싶다고 하면 돼지 껍데기 2000원 어치 사다가 고추장에다 마늘 다진 것 듬뿍 넣고 볶아서 영양을 채우며 살았었지. 그러면서도 당신은 항상 아이들에게 낮은 자리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미덕을 행동으로 가르쳤지. 애비역할 하지 못하는 못난 남편에게 원망하는 눈빛 한번 주지 않았지. 아이들이 돈 못 벌어온다고 하면 좋은 일 하시느라 그렇다고 다독거렸지.’ “애들아! 우리는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배려하는 건강한 가정이 있다. 봐라, 나와 너희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삶이 궁핍했듯이 우리들은 하찮은 물질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이를 극복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날마다 이런 욕망들을 잘라내는 마음으로 매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그래도 가능하지 않겠니?” 하면서.

 그런 당신이 아프다.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해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아픔을 나눠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프다. 동진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가만히 방문을 닫고나와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글=민판기 삽화= 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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