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외로움의 원인

 #91 동진이 택시를 잡아타고 광주천을 따라 내려가니 흰 구름도 덩달아 뒤 따라 온다. 유동 사거리를 자나자 갑자기 먹장구름이 흰 구름을 삼켜버린다. 뒤따라오던 흰 구름은 먹장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동진은 택시 안에서 사라져 버린 흰 구름을 찾으려 고개를 돌려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무등산에도 흰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먹장구름이란 놈이 모두를 삼켜 버렸다. 전남대학교 종합운동장에 들어서니 먹장구름은 비가 되어 내린다. 얄미운 비가 내리는데도 너른 운동장에는 공연을 보러온 많은 사람들이 비옷으로 무장하고 서 있다.

 포플러 높은 나무 가지에선 매미들이 음악소리보다 더 크게 울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맹인가수 이용복이 짙은 선 그라스를 끼고 열두 줄 기타를 반주로 같은 맹인가수 `호세 펠레치아노’의 `원 스 데어 워스 어 러브’를 열창한다. 약간은 메마른듯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노래는 비 내리는 대학 운동장을 촉촉이 적셔준다. `한때 내게도 사랑이 있었지요/ 어느 바다 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었어요/ 헌신으로 가득 채워진 그런 사랑이 말이에요/ 내 모든 인생을 바쳐 소중히 간직한 사랑이었어요/ 그러나 어느 쓸쓸한 날에 당신은 떠나고 말았지요/ 내게도 한때 그런 사랑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 허전한 마음, 혼자라는 것/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요/ 한 때 내게도 사랑이 있었답니다/ 이제 그런 사랑은 하지 못할 거에요/ 그래서 없던 일로 여기기로 했어요/ 한 때 내게도 사랑이 있었지요/ 그러나 아주 오래 전의 일이랍니다’ 이용복의 노랫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동진의 처지를 노래하는 듯 했다.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한동안 그가 부르는 노래에 취해 박수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무대를 바라다보았다. 사회자 이상백님이 박수를 유도하자 그때서야 관객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박수로 화답했다. 다음은 백창우가 나와 존 레넌의 `이매진’을 부른다. 사람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음유시인 백창우의 속마음을 더듬고 몇 사람은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레넌의 이매진은 간결하면서도 담박한 화음의 진행인데도, 더 없이 깊고 절실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열광한다. 동진은 실로 오랜만에 좋은 음악을 들으며 사람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고 가지 말아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무리 마음이 갈급해도 절대로 노름판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동진은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몇 년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방황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아무런 계획이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왔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이번에 짊어진 노름빚은 어떻게 해서든 갚고 나면 화투짝그림도 보지 않으리라……’ 가객 백창우는 계속해서 슬픈 노래를 부른다.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중략)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랑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노래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긴 날숨과 함께 뜨거운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은 신중현의 차례다. 그가 작곡하고 연주한 노래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음악들의 장을 깨트린 독특함이 있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독특한 사운드는 80년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많은 환영을 받고 있었다. 그의 신들린 듯한 기타연주와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의 노래는 전대 운동장을 가득매운 관객들을 춤을 추게 했다. 더 덩실 관객들은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들고 몸을 흔들어 댔다. 음악회는 두 번의 휴식시간을 포함해 장장 250분! 4시간 만에 끝이 났다. 연주자와 청중 모두는 탈진하다시피 했지만, 공연이 끝나고도 기립 박수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운동장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텅 빈 운동장에 동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시 찾아드는 고독! 외로움! 동진은 공연동안 음악과 함께 하면서 외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 동진에게 도시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도 항시 외로웠다. 그 외로움의 원인이 뭘까? 결론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없음’때문이었다. 이는 곧 `관계없음’ 때문이었다. 사막은 사람들이 살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도 늘 외롭고 쓸쓸하다. 이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아무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아서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하기는 이 곳 역시 사막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동진은 허접한 마음에 오랜만에 불로동 미숙이네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92 너무나 오랜만이라 선 듯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하얀 백열등이 켜져 있는 걸로 봐서 영업은 하긴 하는 모양이다. 동진은 다시 마음을 다 잡으며 미숙이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따 누구 신게라우, 어째 이리 오랜 만이다요.” 미숙이 엄마가 반갑게 맞아준다. 미숙이네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것 말고는 욕심 없이 분수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평온한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동진은 미숙이 엄마의 환대에 일순 우울했던 기분이 밝아졌다. “잘 있었는게라우, 사실은 그 동안 이곳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 못 왔구만이라우.” “생각이 나지 않았다니 섭섭허네요.” “미숙이 엄마에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서였어요. 이해하시쇼.”, “알았구만이라우, 세상을 살다보면 부닥치는 일이 많은디. 어째 인자는 괜찮허요.” “예, 비도 내리는디 오늘은 미숙이 엄마하고 한 잔 허고 잡소. 막걸리하고 안주는 적당히 알아서 주시오. 돈은 예나 지금이나 없응께 알아서 간단허게요잉” “그랍시다. 내가 언제 그런 것 따집디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소. 내속도 좀 털어내야 쓰것소.” 동진은 마음이 풀려감을 느꼈다. 하찮은 욕심 때문에 마음도 속이고 미워하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이 썩어 홍어 속이 되어버린 가슴이 툭 열리는 순간이다. 미숙이 엄마는 어느새 뜨끈한 파전을 부쳐서 접시 가득 담아 들고 탁자에 앉는다. “아따 안 그래도 속이 출출 했는디 어째 내 속을 잘 알아서 딱 맞는 안주를 만들었네요, 잉.” “아따, 이 건 상식 아니요.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을 부쳐 먹는 것. 상식대로만 살 수 있으면 사는 것이 재미지고 스트레스도 안 쌓인 당께라우. 그것이 안 되거나 또 그것을 넘으려 하니께 속이 상허고 부작용이 생기제라우” “미숙이 엄마가 철학자요. 자, 그런 의미에서 한잔 헙시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던 동진은 미숙이 엄마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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