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동연가 제43회 사람이 좋아

 #93 `그래 맞아 미숙이 엄마의 말이 맞아 상식대로만 살면 되는 것인데, 그 분수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사니까 부작용이 생기는 거여. 그런데 세상살이는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는 것은 왜 이러지? 하늘나라에 가버린 아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 못할 일 하지 않고 남을 위해 배려하며 양보하며 살았는데도 이 세상은 왜 그녀를 버렸지? 못된 짓 다하고 사기치고 사는 것들은 잘도 사는데 말이야.’ 동진은 이런 생각을 하며 파 대가리를 씹었다.

 “동진씨! 내가 왜 이렇게 술장사를 허는지 아요? 물론 첫 째는 먹고 실기 위해서지라우.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좋아서죠. 나는 하루라도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못살아요. 그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서 애기하고 그 사람들 살아가는 애기를 들으면서 나를 많이 반성하고 그러요.”

 동진은 미숙 엄마의 생활철학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우리들이 살면서 사람들과 잘 부대끼지 않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마음이 없어서다. 계산하며 살고, 조건으로 만나는 생활 패턴에서 영양가 없는 사람들하고는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는 관계 맺기다. 함께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1인칭인 나와 3인칭인 그를 2인칭인 그대로 만들어 나와 그대가 이런 가치로 관계를 맺을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진다.

 동진과 미숙 엄마의 관계 맺기는 순수하다. 조건이 없다. 그러니 거래가 없다. 거래가 없으니 협잡이 없다. 협잡이 없으니 미움이 없다. 미움이 없으니 늘 만나고 싶어진다. “미숙이 엄마 내술 한잔 받으시오. 이 잔은 미숙 엄마에게서 배운 것에 감사하는 술잔이오.”

 “뭔 소리다요? 나 같이 무식헌 사람한테서 배운다는 말은 가당치 않아요. 나는 그저 사람이 좋고, 그래서 사람들과 애기하는 것을 늘 감사허고 살 뿐인디….”

 “그런 생각과 실천이 얼마나 고귀한지 아요? 나는 미숙이 엄마와 술 한 잔 하니께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구만이라우”

 “그라요, 나 역시 감사허요. 항상 생각이 깊은 양반이라 말 붙이기가 어려왔는디 오늘 저녁 빗소리가 내게 큰 용기를 주었구먼이라우”

 “우리 오늘 밤 찢어붑시다. 그리고 마음껏 웃어봅시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놀아붑시다.” 짜잔~ 둔탁한 사발이 쇳소리를 냈다.

 “미숙이 엄마 내가 외우는 시가 하나 있는디 들어볼라요.” 

 “그럽시다.” 미숙이 엄마는 손을 턱에 괴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동진은 목청을 가다듬고 장중하게 목소리를 깔며 “만리길 나서는 날/ 사랑하는 내 처자를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세상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손을 턱에 괴고 동진의 시낭송을 듣고 있던 미숙 엄마의 손이 두 눈으로 올라가 진한 액체를 거두고 있었다. 동진의 두 뺨에도 두 줄기의 물빛이 흐르고, 그렇게 불로동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94 동진이 미숙이 집을 나서자 해는 이미 한 뼘이나 솟아 광주천 물을 덥히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스레트 지붕 위에다 굵은 꽃들이 알알이 박힌 월남치마를 입은 아낙이 빨간 고추를 널고 있다. 동진은 붉게 익은 고추를 보자 취한 술이 더 취한 것 같았다. 몽롱한 머리에 시골에 홀로 계시는 엄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산밭에 오만가지 곡식을 심어놓고 동트는 새벽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득달같이 올라가 땀을 흘리고 계실 엄니를 생각하며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양림 파출소를 지나가자 가끔씩 찾았던 `사직골’ 비탈길 한쪽으로 노란 티셔츠를 입은 스무 살 남짓 되 보이는 젊은이가 고개가 꺾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동진은 다가가 잠든 젊은이를 깨울까 하다가 깨워보았자 동진이 감당할 자신이 없어 못 본척하고 그대로 공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날씨가 춥지 않으니 설마 죽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양심에 위로를 합리화했다.

 필각정은 혼자였다. 사방은 이미 훤히 밝아와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의자 주위에는 간밤에 인간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널려있었다. 인간들은 필요 할 때 찾아와 실컷 괴롭히다가 생채기와 쓰레기만 남기고 떠나 버린다. 동진은 널려 있는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의자에 털썩 몸을 부렸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던데 그 말이 맞는가?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니까 싸움질이 연속되고 서로를 양보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니까 서로를 질투하고 증오하고 남을 헐뜯는 것일까? 도대체 이놈의 인생은 무엇일까? 뭣 땜에 아웅다웅하며 살아갈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왜 사는지.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이런 생각을 할수록 술은 더 취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물음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아침 풀벌레들의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끝나자 이제는 매미들의 헤비메탈의 강열한 비트가 이어진다. 강렬한 비트의 헤비메탈의 음악 소리에 동진은 눈을 떴다.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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