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랑하는 딸 국희야! 넌 음악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서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연주자는 말이야, 이런 사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봐라, 오케스트라에는 각자 자기의 역할이 있지.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첼로는 첼로대로. 이는 곧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만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

 또 연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배치를 보자. 이는 악보와 악기와 연주자라는 세 개의 개체에 의해 정의되는 배치다. 여기서 악기, 손, 악보는 각각 나름대로 이중으로 분절된 지층이다. 물론 피아노는 건반-망치-현(페달)의 계열화로 정의되는 배치지만, 그것은 건반에 의해 분절된 소리(내용의 형식)와 강약과 속도 페달 사용의 여부 등을 표시하는 고유한 기호를 동반하는 이중 분절된 지층이다. 손이나 악보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 각각의 지층만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 개의 지층을 연결하는 손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대로 된 연주가 이루어지려면 이 세 지층 간에 일정한 일대일 대응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삑’ 소리가 나게 되고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다. 눈앞에 피아노가 있어도, 악보가 있어도,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것은 건반을 두드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주에서 요구되는 `일대일대응’을 만들 능력이 없어서이다. 국희야 어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곰곰이 씹어보면 깊은 속뜻을 알 수 있을 거야.

 자, 그러니까 연주의 배치가 요구하는 이러한 대응성을 수립하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너는 부지런히 손가락을 건반에, 악보에 대응 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은 손의 하부지층으로 복무하는 손가락의 근육을 변화 시키는 것이며, 연주기계인 하부지층이 되게 하는데 필요한 조직상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국희야 어때? 표현이 좀 어렵지? 그래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이런 깊은 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런 사유 없이 단순한 기능으로 하는 연주자는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그리고 국희야! 삶이 버겁다고 울지 마라. 너무나 힘이 든다고 짜증내지 마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캄캄하다고 절망하지 마라. 세상은 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끓임 없이 변화하고 있다. 너는 특히 어떤 고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늘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해야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갈 때 비로소 너의 연주는 닫힌 관객들 가슴을 열고 들어가 인간의 근본을 일깨우는 순백의 감동을 줄 것이다.

 동진은 편지를 쓰다말고 튀김으로 배를 채우고 곤히 잠들어 있는 국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것! 한참 재롱이나 피울 나이에 그래도 큰딸이라고 집안일 챙기면서 실의에 빠진 나에게 “아빠,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라고 닦달하던 어른스러움에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다. 편지를 쓰면서도 과연 내가 이런 딸아이에게 어떻게 살라고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런 얘기가 국희의 마음을 열수 있을지….

 동진은 혼자서 천장을 향해 멋 적게 웃었다. `아냐, 나는 못해도, 나는 이렇게 살았어도 자식만큼은 제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부정(父情)! 그것이 있잖아!’ `웃기네! 제발 웃기지 좀 마!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행동을 배우는 거야! 너의 행동이 엉망인데…’ `아냐 그래도 나는 자식에게 할 말은 해야 해’ 동진은 계속해서 혼자 묻고 대답 해봐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3시 반이다. 동진은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좁은 거실에서 맴돌던 담배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간다.

 앞집에서 기르는 장닭이 새벽을 알린다. `꼬끼오! 꼬끼오’ 다시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는 저 닭소리는 분명 새로움을 알리는 소리다. 새로움. 그래 나 역시 이 편지를 쓰면서 새롭게 자신을 정리하는 거야. 딸에게 이렇게 하라고 해놓고선 자신은 그대로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도 이 말을 행동으로 옮겨 본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야! 동진은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히려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달빛아래 꽃들이 이별을 한다. 파란 잎사귀들에 자리를 비워주고, 햇볕과 사귀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햇볕이 키워 가을을 약속하겠지. 그리고는 다시 돌아올 약속을 하고 바람이 가자는 대로 온몸을 맡긴다.

 국희야! 언젠가 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던 바람 부는 고향의 신작로가 생각난다. 자기욕심이나 자기고집을 부리지 않는 바람! 너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디디디딩 디디디딩 피아노 건반이 물위에서 튄다.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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