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100 동진의 일방적인 절음(絶音)에 그룹 `천태산’도 자연스럽게 해체 되었다. 수희는 사랑하는 님을 잃은 것과 동시에 밤무대도 잃어버리고 혼자가 되었다. `죽일 놈!’ 맨날 저 혼자만 생각하고 주위는 모른척하는 얄미운 동진이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하지만 수희의 아픈 것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이 도시를 버려두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도시를 버려두고 나는 떠날 수 없어.’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박정희 정권, 그리고 서울의 봄기운을 무참히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에 가위눌려 모든 국민들은 한마디 저항의 말도, 저항의 몸짓도 할 수 없을 때, 이 도시는 분연히 일어나 이들에 저항했다. 삼천만이 잠들어 있을 때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고 새벽종을 때렸다. 또 젊은이들이 패배주의에 젖어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없는 사랑’ 한대수의 `물 좀 주소’ 노래할 때, 이 도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저항했다. 이런 의로운 도시를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거친 지석강이 흐르는 도곡 들판을 내달렸다. 강둑에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추수를 끝낸 들판은 비어있었다. 허수아비만이 들판을 지키고 있었다. 수희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이 텅 빈 들판에서 험난한 시대에 흩어져 버린 민중들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수백 수천의 물결로 하나 되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내 노래는 우리들의 노래, 우리젊은이의 노래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중의 노래여야 한다. 자 이제 부르자!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허수아비가 노래를 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지석강도 따라 합창을 한다. 서쪽으로 넘어가려던 햇살도 붉은 노을을 토해내면서 새로운 희망을 노래한다. 서러움에 짓눌린 아픔을 노래한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수희의 얼굴이 노을에 번들거린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햇살이 파고든다.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났다. 갓 피어난 갈대꽃이 은빛을 자랑하며 몸뚱이를 흔들어 대고, 흘러가는 세월의 두께만 더해갈 뿐, 차마 수희혼자만 남겨두고 떠나가지 못하던 태양마저 서쪽하늘로 스러져버렸다.



 #101 홀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한 줄로 서있다. 이 들과 간단히 눈인사를 나눈 수희는 바텐더에게 얼음이 가득 담긴 물 한 컵을 주문했다. 바텐더인 옥란이 컵을 정리하다가 방긋 웃어 보이며 수희에게 물 컵을 건넨다. “언니 오늘은 제가 신청한 노래 한 번 해주실래요?” “응, 그래. 무슨 노랜데…” “ 한영애가 재즈 풍으로 부른 노랜데, 뭐드라? 아! 그래 맞다 `봄날은 간다’에요.” 이 노래는 가끔 수희가 손님들이 신청하면 부르는 노래였다. 수희는 자신의 노래를 임희숙과 한영애를 합성시켜놓은 것 같다는 팬들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래 잘 마셨다. 네가 신청한 노래 불러줄게” “고마워요, 언니. 난 사실 언니노래를 들으면 너무 좋아요. 내가 이곳 `배우수업’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하얀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수희는 힘이 났다. 같은 업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먼저 자기 노래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그룹을 할 때는 노래가 사운드에 묻혀 잘못 불러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반주가 단조로운 노래는 그만큼 가창력이 있어야 먹힌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노래를 들으면 함께 공감했을 때 자기의 노래는 생명력을 얻는다. 이들이 가장 소중한 내 노래의 심사위원들이다. 수희는 무대에 올라가 가만히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하얀 건반이 간간히 까만 건반을 받치고 가지런하게 누워있다. 수희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감미로운 음률이 홀 안에 가득 퍼진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조절하던 수희의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리더라’ 얼마 전 도곡 들녘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갈대를 연상하며 진하게 감정을 토해낸다. 수희가 노래를 부르자 모두는 고요해졌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수희는 노래를 부르면서 동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개새끼! 나만 혼자 남겨두고는 바람처럼 냉정하게 떠나버린 개새끼! 그 개새끼 다시는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욕을 하면 할수록 개새끼는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내게 처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 사람! 그가 꿈꾸는 평등 세상도 이해는 하지만 이뤄지기 어렵다는 현실 때문에 그냥 남들같이 둥글둥글 살지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갈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아직도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이슬같이 맑은 따뜻한 가슴 때문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마지막 구절을 부르던 수희의 어깨가 흔들린다. 피아노건반에 눈물이 떨어진다. 간주 애드립은 더 간절하다. 마이너 반음사이로 가끔씩 장음을 터치하며 설음을 더했다. 자유롭게 스케일을 넘나드는 수희의 손가락이 무아의 경지에서 해탈을 한다. 아! 자유 어느 것 하나에도 걸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 수희는 다시 더 힘차게 건반을 건드리며 진정한 자유를 유영한다.

 글=민판기·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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