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엄마의 엽기적인 행동에 수희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온 수희는 뒤에서 쫒아오는 엄마를 따돌리려고 잘 아는 골목으로 마구 내달렸다. 자기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한참을 뛰어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숨이 막혀 뛸 수가 없었다. 잡혀 가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 깊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도 없다. 서늘한 갈바람이 수희의 머리를 노크한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신봉하는지. 수희는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부모님의 위선된 행동이 역겨워 집을 나왔는데, 이곳까지 와서 무례한 일을 저지르는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영혼! 시들은 마음! 이 도시에도 수희의 상처를 위로해 줄 그 무엇도 없었다. 이럴 때 동진이 있었으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없이 울기라도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 더욱 슬펐다.

 수희는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휘황찬란한 불빛을 뒤로하고 15번 증심사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은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 수희는 뒷자리로 가서 무거운 몸을 부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속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희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보았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죽는다고 생각하자 갈래로 찢겨진 마음이 하나로 정리되어 홀가분해졌다. `원래 없었던 비본래적 존재에서처럼 넘어설 수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하이데거의 말이 다가왔다. 이제 남은 시간은 남들을 따라 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돈을 좇아서, 때로는 남들이 갖고 있는 명품을 갖지 못해 안달을 했던 자신이 한없이 우스워졌다. 이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자연인 수희로 살리라.

 차가 멈췄다. 종점이다. 차에서 내린 수희는 증심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 가까이 소나무 밑에 구절초가 하얗게 울고 있었다. 구절초는 어둠속에서 시리게 희었다. 구절초! 깊어져 버린 가을에 물결을 이룬 구절초는 나를 외로운 수선화로 만들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인적이 없는 산사 가는 길은 적요했다. 은행잎이 바람을 태우고 달아난다. 다리를 건너자 작은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밤 물소리는 누군가가 연주하는 음악소리 같다. 인간들의 찌꺼기가 섞이지 않아 맑다. `후드득’ 도토리가 먼저 떠난 낙엽 위에 떨어진다. `후드득~’ 연이어 도토리는 자신이 깔아놓은 이불 위로 다치지 않게 열매를 떨어트린다. 수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낙엽들이 꽃비처럼 떨어진다. 이별이다. 낙엽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지나온 여정들을 반추하는 듯 잠시 허공을 맴돌다 아름다운 작별을 한다. 떨어진 낙엽 들은 땅과 만나 다시 새로운 기약을 한다. 하늘은 햇볕과 비를 주고, 땅은 이를 잘 조합해서 키워낸다. 그렇게 자라나 질서를 지키다가 다시 떠날 때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수희는 손끝으로 방금 생을 마감한 낙엽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느낌은 차갑지도, 그렇다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 숨이 끓어진 생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이 엄숙하고도 숭고한 대자연의 이치를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엄마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하나님도 아니다.

 #104 멀리 보이는 산사에는 작은 불빛들이 움직임도 없이 서 있다. 남쪽 하늘에는 늦가을에 하현달이 아주 잡힐 듯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증심사 앞마당에는 두서너 군데 모닥불이 타오른다. 덜 마른 나무는 타면서 고통스러운 연기를 피워낸다.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이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굴레 수염이 무성한 중년 사내는 은박지에 싼 고구마 하나를 찾아내어 한입 베어 문다. 구수한 냄새가 수희의 코를 자극한다. `뭐지? 아니 이 늦은 밤에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늦가을 추수가 끝날 때쯤이면 하는 산사음악회다. 수희는 누가 볼세라 가만히 의자들 맨 끝자리에 앉았다.

 산사의 가을은 차가웠다. 수희는 옷깃을 여미며 팔짱을 끼었다. 무대 한쪽에는 신디와 반대편에는 이곳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자 기타가 서있다. 여는 음악은 젊은 남녀다. 광주에서도 처음 보는 이들이다. 고요와 적막을 넘나드는 이들의 사운드는 모닥불을 차분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오래된 여가수와 운동권에서 노래하다 출가한 스님의 노래는 외로운 가을밤을 더욱 더 외롭게 만들어주었다. 가끔씩 흐느끼는 듯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나무가 된 노래’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음악회는 이제 마지막 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시대의 자유인!”이라는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덥수룩한 머리에 야전잠바를 걸친 한 남자가 무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저 남자는?”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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