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성시대 `그녀’를 그리다

▲ 마르쿠스 헤라르츠, 엘리자베스 1세, 241.3×152.4cm, 캔버스에 유채, 1592.
 영어. 세계 어디에 태어나도 배워야 하는 언어이다. 각 나라 안에서만 살던 19세기 이전에는 영어를 몰라도 상관없었지만, 이젠 우리나라 대통령도 미국에 가면 영어로 연설을 시작하는 그런 세상이다. 영국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짰다는 면에서 세계에서 최고로 잘난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짜놓은 게임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그들에게서 나왔고 현재까지는 그들의 틀이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어는 그들의 영원한 자산이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건, 어디를 가건 영어를 해야만 한다. 물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힘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을 낳은 것은 영국이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은 영국의 것이다.

 현재의 대영제국을 만든 것은 영국의 식민정책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를 군사적 또는 경제적 또는 문화적으로 침략하여 그 나라의 자산을 착취하는 것.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쳐 해상권을 장악한 후, 전 세계를 향한 약탈과 살육으로 현재의 영국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섬나라 안에서만 있었다면 그저 아일랜드 정도의 보통 나라였을 것이다.

 

 헨리8세-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나

 

 엘리자베스 1세 시기(제위기간 1558~1603, 44년간)부터 내정이 안정되고 문화가 부흥하고, 해외진출이 시작되었기에 이때를 절대왕권이 안정된 시기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1세를 기리는 영화 ‘골든 에이지’는 영국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나타내 준다. 그녀의 일생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아 그의 아버지인 헨리8세, 그녀의 어머니인 앤 불린은 우리나라 사극처럼 각각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즐겨 사용된다.

 헨리8세는 본처와 이혼하고 본처의 시녀였던 앤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의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기까지 했지만, 결국은 앤을 간통죄로 참수형에 처한다. 앤이 왕비였던 기간이 1000일이어서 ‘1000일의 앤’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된 적도 있다. 헨리8세는 일생동안 6명의 여자와 결혼했으며, 이 중 2명을 간통죄로 참수하였다. 아들 에드워드가 헨리8세 이후 왕위에 오르지만 병약하여 짧은 생을 마감하자, 장녀인 메리가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지만, 300명에 달하는 신교도를 화형에 처하여 블러드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린다. 죄 없는 이를 자기와는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300여 명을 화형에 처했는데 물론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자기의 세력기반이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블러드 메리라고 부르지만,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재임 시에 6000여 명의 범죄자들을 참수했으니 엘리자베스 1세도 블러드 엘리자베스라고 불려도 할 말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유독 메리에게만 ‘블러드’란 악명을 붙인 것은 그가 국민통합에 실패했고, 엘리자베스는 국민통합에 성공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통치행위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내치 안정, 외교·국방 튼튼

 

 헨리8세의 서녀로 태어나 엄마가 참수당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는 설상가상으로 왕위계승권 3위였기 때문에,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려 시골마을에서 죽은 듯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위협하던 메리가 병사하자, 25세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하루아침에 팔자가 바뀐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업적은 내정에 성공하고, 외교와 국방을 튼튼히 했다는 것이다. 전임자인 메리의 실정을 교훈삼아 종교 간의 화합을 추구했고, 중용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영국의 성공회가 확고한 국교로 되는 데 기여했다. 정치에 있어서도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의회에 해당하는 추밀원과의 긴밀한 관계를 최우선하였다. 독단은 균형을 깨트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녀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해상권을 장악하고, 신대륙 발견 등의 해외진출을 시작하였으며, 빈민구제법 등을 시행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이러한 국민의식의 발현 속에 그동안 언어로 대접받지도 못하던 영어가 비로소 언어로 대접받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나타난 셰익스피어의 문학,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 등은 국가가 안정되었을 때 문화가 융성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보석과 의상을 좋아하고, 궁중내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만 쳐다보기를 원하는 그런 여자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자신의 외모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하는 그런 여왕이었지만, 아버지의 바람기, 어머니의 야욕은 그대로 엘리자베스에게 전해졌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병적으로 좋아했던 화려한 보석, 무거운 왕관,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은 풍성한 드레스와 장식은 그녀의 실제 모습이다. 이 그림에는 “그녀는 주지만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 있지만 보복하지 않는다” “되갚아 줄 경우에 그녀는 권력을 증가시킨다”라는 문장이 라틴어로 적혀있다. 물론 철저한 사탕발림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 문구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게 맞다. 이 초상화는 엘리자베스에게 바쳐서 아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초상화는 모두 폐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골든 에이지를 이끈 여왕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철저하게 권력지향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치와 권력욕을 가려줄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을 통합시킨 그녀의 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국의 골든 에이지를 이끈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철저히 아부 위해 그려진 작품

 

 영국은 아직도 왕이 국가의 수반이다. 이 민주주의의 시대에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특권을 부여받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지만, 정치계이든, 경제계이든, 종교계이든, 심지어는 노동계까지 자신의 자식을 후계로 삼는 행태를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같은 세상이다. 아버지를 왕으로 두어 자신도 여왕이 되었던 엘리자베스 1세, 그러나 대결과 분열, 공작의 정치에서 벗어나 국민통합과 국가부흥을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골든 에이지를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변길현<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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