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권력-욕망’ 불순한 삼각관계

 욕망은 두 가지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나타난다. 욕망은 우리를 새로운 도전을 향해서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인이고, 힘이다. 반면에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끊임없이 다른 것을 원하고, 그래서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든다. 이러한 욕망의 질곡과 변증법을 괴테의 `파우스트’를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 박사라는 인물을 통해서 정신의 자유와 젊음을 향한 욕망이 점점 권력과 지배를 위한 욕망으로 바뀌고, 이러한 욕망이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표출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파우스트’를 인간의 행위와 그 뒤에 가려진 욕망을 중심으로 읽어 보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은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쾌락을 맛본 파우스트 박사는 마지막으로 `누구나 자유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꿈꾼다. 그리고 괴테는 이러한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서 `착한 생각’ 뒤에 숨은 지배욕망의 의미, 지식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묘사한다. 이제 백발의 노년에 이른 파우스트 박사는 개인의 만족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행위가 `의미 있는’ 일을 통해서만 삶을 가치 있게 한다고 생각하고, 노년을 멋진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쓰기로 한다.

 파우스트 박사는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진 해안가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보고, 그 곳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마음먹는다. 억압적인 낡은 제도와 법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왕은 물론이고 심지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마저도 바다를 메워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욕망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통치능력도 없이 우둔하기만 한 왕은 파우스트 박사에게 선뜻 해안가를 하사하고, 박사는 열정적으로 공동체 건설을 서두른다. 이러한 박사의 모습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도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바다 밑에 버려진 땅을 사람의 세상으로 만든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놀라운 행동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악마도 능가하는 인간의 지식 앞에서 메피스토펠레스마저 순종하며, 박사를 주인으로 섬긴다.

 그런데 당시로는 어이없기 짝이 없는 이러한 간척이야기를 통해서 괴테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사람 살 땅이 부족하던 시대도 아니고, 과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도 않은 때 파우스트 박사를 간척 사업가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야망가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욕망의 실현이라는 것을 파우스트 박사는 스스로 밝힌다.

 

 지배권을 획득하는 거다, 소유권도!

 행위가 전부다. 명성은 허무한 것이다.(10187-10188행)

 파우스트 박사는 이제 단순히 젊음과 쾌락을 위한 욕망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서, 모두가 복종하는 그러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이다. 욕망 중에 가장 치명적인 욕망이 권력에 대한 것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박사의 권력을 향한 욕망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박사의 해박한 지식과 근대적 계몽사상이다. 파우스트 박사의 눈에는 파도만 철썩이는 바다는 쓸 모가 없고, 이런 바다를 그대로 두는 것 또한 낭비일 뿐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생산하는 존재만 존재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 결실이 없는 파도는 그 비생산성을 퍼뜨리려

 사방팔방으로 접근해 온다.(…)

 연이은 파도는 힘에 넘쳐 그곳을 지배하지만,

 물러간 뒤엔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10212-10217행)

 

 여기에서 파우스트 박사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합리성에 집착하는 계몽적인 논리다. 자연도 눈에 보이는 생산성, 즉 효율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일 없이 파도만 쳐대는 바다를 없애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우리와 아주 많이 닮지 않았는가? 아니, 그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파우스트 박사처럼 우리는 개발이 곧 발전이라고 여기며, 매연으로 가득한 산업화가 현대적이라고 믿지 않는가?

 19세기 계몽사상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가치를 일깨운 것은 대단한 사실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때부터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아서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최고로 생각하는 까닭에, 거침없이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우주의 지배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점점 지식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배하기 위한 지식, 통제하기 위한 권력, 맹목적으로 이기적인 욕망은 위험한 삼각관계를 맺는다. 이 삼각관계 속에서 인간이 못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인간의 진보란 사실 욕망과 지배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파우스트 박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욕망은 욕망 없는 자를 증오한다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은 파우스트 박사에게 또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고, 욕망은 재빨리 먹잇감을 찾아낸다. 이번에는 언덕 위에 사는 가난하지만 경건한 삶을 사는 노부부가 목표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박사의 뜻대로 되었지만, 이 노부부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파우스트 박사의 심기가 늘 불편하다. 부부는 파우스트 박사와 `달라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특별한 욕심도 소원도 없다. 그저 자신들의 오두막에서 매일매일을 감사하며,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살아 갈 뿐이다. 이들은 화려한 도시 생활도, 세상의 눈부신 발전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를 재앙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낮에는 궁노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뚝딱 뚝딱 공연히 소란만 피우는데,

 밤이 되면 작은 불꽃들이 떠지어 우글대지만,

 다음날에 벌써 둑이 하나 되어 있더란 말예요.

 사람 제물을 바쳐 피를 흘린 게 틀림없어요.(11123-11127행)

 그래서 이 부부는 자고 깨면 뚝딱하고 생기는 도시나,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토목 공사는 자연을 폭력으로 파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부가 바로 신화에 나오는 `필레몬과 바우키스’다. 이들은 평생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다가 제우스신에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남편인 필레몬은 참나무로, 아내인 바우키스는 보리수나무로 변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괴테는 이 부부를 `파우스트’작품 속에 옮겨서 파우스트의 욕망 속의 또 다른 욕망을 폭로한다. 이제 이 부부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파우스트 박사의 완벽한 권력과 지배 앞에 놓인 마지막 걸림돌이 된 것이다. 어느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누가 감히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저 언덕 위의 노인들을 몰아내고

 보리수 그늘을 내 자리로 삼고 싶다.(11239행)

 

 이 간단한 한 마디에 노부부의 삶은 무너지지만, 끝내 노부부는 굴복 대신 죽음을 택한다. 파우스트 박사가 노부부를 참지 못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 이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는 삶으로 파우스트 박사를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은 자신만이 절대법이 되고 싶어 하며, 마침내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으로 커가기 마련이다. 반면에 노부부는 욕망의 경계를 넘지 않는 겸허한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거침없는 질주를 해온 파우스트 박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부부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노부부의 죽음 뒤로 박사의 깊지만 공허한 비탄이 이어진다.

 파우스트 박사는 권력으로 `모두의 공동체’ 실현을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노부부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심옥숙<문학박사, 전남대 강의교수/무등지성 대표>

※`괴테의 파우스트1’은 본보 1월13일자(12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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