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적 표본 의도적 개입 아닌가?

▲ `100%광주’ 리허설 모습.<사진=아시아문화개발원>

 지난 4월20일(일요일) 오후 3시에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주최한 공연 ‘100% 광주’(리미니 프로트콜)라는 연극을 봤다. 시골로 살러 온 이래 가급적 광주를 잊고 지내고자 했지만, 1980년부터 내 청춘의 중요한 시기 30년을 보내온 도시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래저래 관음증 환자처럼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연극은 전문배우가 아닌 사람들 100명이 출연한 것이었는데, 광주의 인구를 150만 명으로 봤을 때, 1만5000명당 1명씩 나이, 직업, 성, 정치적 지향, 사회관계 등을 고려해서 뽑았다 했다. 내용은 100명이 40분간 자기 소개를 한 다음 80분간 광주의 통계적 수치를 ‘실제와 허구 사이의 경계에서 진동’한다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들(안내문에 따르자면 전문배우)이 주어진 질문에 찬반의 이분법적 의사표시를 무대 한 중앙에 그려진 줄로 나뉘어 서는 방식이었다.

 

 광주의 내재적 측면에 더 치중해야

 

 독일 기센대학의 응용연극학과 3인조가 2008년에 ‘100% 베를린’으로부터 시작해 런던, 도쿄 등 지구촌 각지에서 했던 극인데, 광주에 와 내용을 달리해 꾸민 것이었다. 기존의 극형식과 달리 ‘우연성과 돌발성, 인지적 충격과 감각적 긴장’을 제공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관객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도록 동기화하는 일련의 과정’(김기란)이라고 했다.

 150만 광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실제의 상황 즉 2013년 광주시의 통계학적 내용을 극화 한 이 공연은 내게 예술표현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예술은 일반성보다는 특수성, 개성, 차이 같은 것에 주목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식은 정말 낯설었다. 예술이라는 인간행동이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삶의 총체적 양상을 두루 포괄할 수 있을까? 통계와 예술이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 일단이었다.

 그 통계적 표본은 의도적 개입의 혐의가 짙어 보였다. 근거들은 이런 것이다. 100명 중 내가 아는 사람이 4명이었다. 그 통계적 수치에 대입하자면 나는 150만 광주시민 중 무려 6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도저히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 1%의 외국 출신이 살고 있으니까 그 중 한 명이 출연했는데, 그는 1% 중에서도 대단히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귀화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였다. 한 명의 정신대 할머니의 출연도 일반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 극은 일반적 통계수치를 근거로 작업했다고 하지만 대단히 자의적인,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연출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는데, 실로 그 내용은 대단히 지루해서 이것을 아시아예술극장이라는 곳에서 개관 전에 미리 선보이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엉성해 보였다. 5·18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정치적 입장, 핸드폰을 사용하거나 사람들의 시간대별 생활모습 같은 질문의 항목들이 그랬다.

 극이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관객 중에서 70년대 이래 광주에서 마당극운동을 해왔던 몇몇 사람들의 얼굴을 얼핏 볼 수 있었는데, 얼핏 그들이 느꼈을 법 한 상실감의 일단을 생각해봤다. 반도에서 광주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예술적 지향이 강했고, 극예술의 측면에서라면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이런 것들은 무척 왜소해지고 글로벌 한 예술양식이 실험되고 있다.

 무척 억지스러운 소리지만, 광주비엔날레나 문화도시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광주 사람들 사이에는 ‘광주는 마당만 제공하고 객들이 초 치고 장 치고 다 한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공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런 말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생각과 행동들은 엄연히 현존한다. 따라서 이 극이 표방하는 진술대로 ‘실제의 광주’를 의도했다면, 최소한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아시아문화의전당 아시아예술극장에서 개관을 앞두고 한 공연이라기엔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광주만의 특별함, 남아있기나 한가

 

 나는 광주가 더 실속 있는 문화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지구촌이나 아시아의 일반적 측면보다 광주의 내재적 측면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일반성과 특수성이란 개념상의 분류일 뿐, 실재하는 대상이나 현실에서 이 둘을 나누기는 무척 힘들다. 비약하자면 광주나 광주 사람들의 삶 속에는 이미 지구촌의 일반성이 너무 깊게 침윤되어 있다. ‘나는 너다’는 광주 출신 한 시인의 진술처럼.

 우리가 쓰는 말, 일상생활, 정치사회적 현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이나 자연조건들의 연계고리들은 너무너무 촘촘히 엮여져 있다는 거다. 100년 200년 전의 우리네 사람살이와 지금을 비교해보자. 도대체 광주의 특별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지. 종교적 진술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미 나와 광주 속에는 우리와 지구촌은 물론 사회와 자연,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속속들이 깃들어 있다.

 이즈음 한 사람이 아무리 백이숙제처럼 은둔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교통 통신의 발달과 같은 현대사회의 여러 현실을 생각해보자.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해도 지구촌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지 않는가? 대체 이 불가해한 삶의 알레고리들 속에서 문화, 예술, 극이 지향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통계의 추출과 활용이라는 구조와 달리 예술 창조와 유통은 그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 따라서 나는 현대연극의 대표적 실험이라는 ‘100% 광주’가 광주를 아시아의 문화도시로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어떤 함의의 기제로 작용할지에 대해 생각해볼 때 너무 가슴이 아렸다.

윤정현



윤정현은 강진 출신으로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3년째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잘 살기’를 꿈꾸는 미학에세이를 쓰며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명발당’은 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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