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강진·장흥·보성·고흥의 작은 마을장터들

▲ 자발적 개인들이 모여든 마실장 모습.

 최근 전남 서남부 해안지역에서는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열어가는 군 단위의 ‘장터’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작년 초, ‘오래된 숲’(대표 문충선) 마당에서 새로 생긴 월간 장흥 지역신문 ‘마실가자’의 부대행사로 한 달에 한 번씩 열렸던 게 그 시작이었다.

 기존의 지역신문들과는 지향점이 크게 다른 이 신문의 발간취지에 동감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 자연스레 ‘우리가 만든 것을 서로 나누자’는 소박한 바람으로 출발했다. 참여자들은 30-50대 내외의 이 지역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스스로 농사를 지은 쌀이나 감자, 콩 같은 곡물을 조금씩 가져와 다른 것과 물물교환을 하거나 돈을 받고 팔았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발효시켜서 만든 맥주를 페트병에 담아와 팔거나 나눠먹기도 했고, 나무나 천으로 된 그 무엇을 만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무농약, 저비료 등 생태적 가치에 충실한 생산물들이었다. ‘마실장터’라 불렀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만에 만족하지 말고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자’는 뜻에서 읍내 토요시장에서 장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크게 방향을 바꿔 잡았다. 익히 알다시피 이즈음 면단위 장터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인데, 그중 한 곳인 용산 면소재지 장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굳이 그곳이었던 이유는 그곳의 젊은 생태적 귀농인들이 쓸쓸하게 사그라져 가는 그 장터에 윤기를 불어넣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주말과 5일장이 겹치는 날에 열린다.

 이즈음 귀농인들 중에는 대부분이 그렇듯 기존의 관행농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문화적 가치와 더불어 유기농, 저농약 같은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슬로우시티였던 장흥에는 유독 그런 이들이 많고, 특히나 용산면에는 더욱 그렇다. 처음 몇 십 명 정도 모였던 장터 사람들도 다달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늘어가고 있다.

 장흥 ‘마실장’이 이렇게 활발해지자 인근 강진, 해남, 보성, 고흥 지역에서 이런 가치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장을 열기 시작했다. 강진의 ‘정거장’(읍내 장터), 해남의 ‘모실장’(읍내 서림공원), 보성(‘녹색살림장’, 벌교 소화다리)과 고흥(‘미치고 환장’) 등지에서 대부분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리고 있다. 또 멀리 곡성(‘콩장’)과 구례(‘영판 오진 장’)에서도 열린다.

 이 장터들은 ‘자발적 개인들’의 참여를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꼽고 있다.

 오래 전, ‘녹색평론’에서 나는 ‘서구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예로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들 수 있는데, 그 기반은 자발적 소농들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그리스의 산업은 가족단위의 소농 중심이었는데,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농민이 갖는 세계관과 생활방식이 서양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최고로 꽃피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통이 활발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시기였으니 삶의 근원은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굳게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체제나 사회 상황에 개인적 삶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왕이나 이웃 같은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었다는 말이다.

 그 자립적 의식과 행동의 개인들이 광장에 모였을 때, 그러니까 개인적 자아가 배제된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완성도가 높은 개인들이 모인 ‘연대’를 통해 민주주의의 성화盛化를 이뤘던 것이다. 자립적 소농의 시민들이였기에 아크로폴리스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했다.

 작은 마을장터들은 요즈음 그 흔해 빠진 정부기관이나 행정단위 같은 곳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자니 자연히 장터는 버린 천 조각을 바늘로 꿰매 붙여 로고타입을 만들거나 간이탁자를 쓰기도 하고, 또 바닥에 보자기를 깐 채 물건을 팔기도 하는 등, 장옥場屋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허름한 난장이 따로 없다.

 하지만 찾는 사람들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늘어가고, 갖고나오는 품목들도 다양해지고 있다. 유기농 식재료를 이용한 쿠키를 만들어 오는 사람, 생약초를 이용해 차나 음료, 건강식품이나 약을 만들어오는 사람, 주변의 자연재료를 이용해 바구니나 나무용품 같은 걸 만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직접 농사를 짓거나 만들어서 자연에 밀착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접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것들이다. 복잡한 유통 단계는 애당초 끼어들 여지가 없다.

 또 이 장터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장이 된다. 녹색당에 소속된 이 지역 사람들이 적극적인 편인데, 이들 말고도 지역의 귀농인들이나 환경, 자치,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단체가 아닌 한사람 한 사람씩의 개인으로 참여한다. 현학적이거나 무슨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모인 사람들은 타로점을 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카드놀이를 하기도 한다. 노래와 공연이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물건을 사고파는 것보다 분위기가 좋아서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여러 도시 지역들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장터가 만들어지고 있고, 또 다른 지역들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이토록 빈틈없이 자발적이고 독립된 개인들이 모이는 장터는 드물 듯 싶다. 서울에서 가장 먼 반도의 끝자락, 남녘의 작은 마을장터들이 즐겁다.

윤정현 <시인>



윤정현은 강진 출신으로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3년째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잘 살기’를 꿈꾸는 미학에세이를 쓰며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명발당’은 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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