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근원으로부터 차오르는 것

▲ 방촌 석장승.

 눈썹 같은 달이 그네 같은 달로 바뀌며 만월을 향해 차오르고 있다. 잠시 다녀온 남도의 뜨락은 객토를 하는 손길과 나물을 캐는 손길, 가지치기를 하는 손길 등 쉴 틈이 없어 보인다. 며칠 따스한 볕이 아지랑이 꼬물대게 하고 있고, 겨우내 얼은 손처럼 새파랗던 강물은 이제 산이 토해낸 황토를 머금어 먹빛과 흙빛의 중간계의 색을 띠고 힘차게 흘러간다. 벌써 양지쪽에는 개불알풀, 광대나물이 피어있고, 산수유와 매화는 우듬지에서 세상을 향해 단내 나는 폭발음을 준비하고 있다. 사위가 이렇듯 긴장하는 계절은 바로 봄을 지척에 둔 지금, 보름 무렵이다. 묵은 것들을 거둬내는 설이면 보름은 이제 삿된 것을 제어하고 오로지 순탄한 생명의 풍요를 기원하는 마당이렸다. 덕분에 아직 어르신들이 남아있는 시골 마을에는 왼새끼를 꽈서 동티를 막는 금줄을 만들고 당산나무에 두르려는 신성한 의식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한데 그게 마뜩치 않다. 세상이 너무 휙 휙 가버리는 것이다. 누백년 지켜온 전통의 문화는 삿된 미신이나 부질없는 일 따위로 치부되고 농경의 단합된 힘을 구축했던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같은 것은 문화재 지정을 받고 행정의 재원과 동력이 보태져야 겨우 유지되는 현상으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한편 이것들을 마을의 상품으로 이용하는 이들은 그 마을이 평야인지 산촌이었는지 조차 모르고 무작정 달집태우기로 모아가고 있다. 산촌마을에서 행하던 의례가 현 시대에 오면서 그 모습의 화려함과 재료 구하기의 수월성에 힘입어 마을의 지형, 지세와 상관치 않고 행해지는 추세인 것이다. 달이 갖는 의미망은 음, 여성, 물 등으로 이에 걸맞게 다시 생산, 풍요 등으로 이어지며 백성들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새싹이 터오는 무렵, 만물이 대지를 뚫고 기운 생동하게 성장하는 것, 만월처럼 풍성한 수확의 기도가 보름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무대화된 고유성으로 포장되어 박물관이나 문화관의 한켠에서 이뤄진다.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의 근원을 묻고 힘들더라도 가져가려고 하니 말이다.

 비워진 뜨락 사이에서 이런 저런 사념들을 갖고 있다 도착한 곳은 “존재하네”(실학자인 존재 위백규 선생을 그 마을 사람들은 존재 할아버지의 전라도 언어로 부를 때 이리한다) 로 유명한 장흥관산의 방촌 마을이었다. 이 십여 년 전 답사를 왔을 때 만났던 장승이 궁금했다. 경지정리가 되어 시원한 뜨락인지라 대저 장승이 어디로 간 것인지 가늠되지 않다가 그 마을 출신 후배에게 전화를 해서 만날 수 있었다. 세월에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헌헌장부 같은 기상이 여전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악귀들은 다 쫓아낼 기세의 눈과 코와 입과 이마를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장승이 뜨락에 불끈 솟아오른 것이 생식의 기능과 또 닿아있음을 느껴볼 수 있었다.

 베어지고 부러뜨려지고, 도난당해 뉘 집의 장식품으로 쓰이는 장승들 부지기수인데 금줄을 일 년 내내 대님처럼 묶고 있는 것이 여전히 신성한 수호신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낼 모래면 그 금줄도 새것으로 또 모셔질 것 생각하니 이 전통을 지켜주는 마을 분들에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진다. 매해 음력 2월 초하루면 솟대를 세우는 화순 동복의 가수리 마을을 십여 년 전 찾은 적이 떠오른다. 신성한 우주목이니 가장 먼저 동쪽으로부터 해를 받아들이는 나무,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성스러운 공간의 나무여야 된다고 그 나무를 찾고 신목을 점지해준 산신께 제를 올리고 성과 속을 구분하는 다리를 건너 마침내 봉우리에 오리를 얹고 우뚝 치솟는 짐대를 모시는 의식을 보면서 관광 상품이 아니라 모방이 아니라 그 전통 영원하길 기원했었는데, 올해 들렸더니 인자 아조 힘들겠다고 하신다. 고령화되어 버린 어르신들, 도시로 이주해 비워지는 마을의 신산한 풍경 앞에서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그득했다.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살릴 수 있을 것인지. 이제 미풍양속, 민속, 마을 재주꾼의 발굴과 계승을 책자로만 정리해서는 도저히 안 될 임계점에 이른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전통의 계승을 문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활화하는 것, 이것만이 저 광속의 시대에 우리의 얼을 지키는 것 일진데 나 또한 속절없이 종이만 축내고 있다.

전고필



`전고필’ 님은 항상 `길 위에’ 있습니다. 평생 떠돌며 살고자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관광의 핵심은 `관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는 눈. 그것들을 찾아 평생 떠돌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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