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 `공감’의 연한을 정하자

▲ 대인시장에서 공공미술 작업을 하는 모습.

 공공성을 담아내고, 대중과 함께 공감하는 예술이 진정으로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 일까는 잘 모르겠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굴 벽화나 암각화 등에서 만나는 그림은 그 안에 담겨있는 신성성과 기원성에 사뭇 긴장이 된다. 우리들 곁에도 여수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암각화가 있고,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도 있으며, 고령에도 암각화가 일상과 함께하는 당대인의 염원 속에 표출되어 전해오고 있으니 역사는 참으로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공감하는 예술로서 공공미술이 그 오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들어서는 다시 사용되었다. 이른바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가, 특히 미술인들이 그 선봉에 투여되었다. 그게 미국의 일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량 실업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의 공공성을 매개로 하여 예술인의 존망을 관장한 것이었다.

 

 공공미술의 발전 속 부작용 켜켜이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건축에 심미적 의미의 공공미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른바 1% 법으로 발전되었다. 건축비의 1%를 투여하여 공공성 높은 작품을 건물 앞에 배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활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른바 건축주와 예술인 권력 간의 짬짬이가 등장했고, 몇몇 예술인은 아예 이일을 직업으로 삼아 싹쓸이를 하고, 하청을 하는 등의 문제점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진정한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이 서울의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논의되었고, 한편으로는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예술이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발화되기도 했다. 예술은 결코 어느 좋은 자리에서 기름기를 묻히고 살만 피둥 찌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유명세를 탄 지역들이 등장했다. 부산의 감천마을이나, 통영의 동피랑 같은 마을이 대표적이다.

 기실 동피랑은 재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주민을 위한 긴급 대책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한데 그 구상과 시행의 방법이 남달랐다. 현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 반대급부를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따랐고, 또 하나 그려진 그림의 수명이 라는 경이로운 기회가 있었다. 두해에 한번 씩 공모를 통해 진행하는 벽화 교체 작업은 모두가 선호하는 작품이 2년 후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 작업에 모두가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에게 반대급부는 동피랑의 꼭대기에 있는 구판장을 통해 판매수익을 주민에게 다시 환원해 주는 시스템을 갖췄다는데 있었다. 감천마을의 경우는 다르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다닥다닥 층위를 이룬 마을의 담벽에 등장한 벽화는 눈요기 감으로는 최고였지만, 주민들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현지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의 턱 앞에 자본으로 무장한 장사꾼들이 점포를 얻어 오고 그들의 공동체와 생계 기반을 위협해왔다.

 

 공공미술에서 센세이션은 가능할까?



 광주의 공공미술의 위치는 어디일까? 아마 이런 공공성의 기반을 갖춘 것은 1997년 제2회 비엔날레 때일 것이다. 건축평론가 박호재 씨와 주홍 씨, 강원 씨가 함께 한 ‘도시의 꿈’이 첫 선을 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수창초등학교의 벽에 그려졌던 학생들의 꿈이 비엔날레에 대한 이해와 공공미술에 대한 시선을 확 바꿔주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공공의 이름으로 금남로에 조각의 거리 프로젝트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렇잖아도 거리 가구들이 즐비해서 보행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 들어선 금남로의 역사와는 무관한 작품들이 달리는 차를 향한 것인지 걷는 보행인을 향한 것인지 알쏭달쏭하게 서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그 상황은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그리고 박성현 감독을 중심으로 해서 이뤄진 중흥동 산252번지에서 이뤄진 것이 본격적인 삶속의 공공미술의 장이었고, 그와 유사한 시간에 각화동 일원에서는 이재길 조각가를 중심으로 작가들이 시와 그림이 있는 마을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중흥동의 일은 한시적 사업이라서 끝났고, 각화동은 아직도 다양한 채널의 지원을 통해 유지·존속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복기해보면서 광주 시청사 내부의 무등산을 광섬유로 2003년 설치된 작품을 바라본다. 지엄한 어머니의 산 무등산을 당시 최고의 신기술을 도입하여 만든 작품이 시청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를 내려 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안타까움이 인다. 공공청사를 장식하는 그림은 작가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시민에게도 각별하다지만, 언제까지 그 광섬유가 먼지를 툴툴 맞아가며 저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 의문도 일기 때문이다. 아마 시청사를 새로 신축하면 가능한 것일까? 동피랑의 지혜가 새삼 부럽다.

전고필



`전고필’ 님은 항상 `길 위에’ 있습니다. 평생 떠돌며 살고자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관광의 핵심은 `관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는 눈. 그것들을 찾아 평생 떠돌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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