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살코기 수북·시뻘건 육수 철철

 23번, 젊은 처자가 내민 번호표다. 뭐, 중간에 가셔도 무방하다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전해졌다. 한적한 도로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 평동 농협 앞에 서있는 양복 입은 사람들, 담벼락의 그늘 아래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 명화 방앗간의 그늘막에 서 있는 사람들, 군복 입은 여군과 장정들,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들 모두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오직 만개한 개나리와 붉은 홍매만이 아무렇지 않게 이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봄 햇살에 얼굴이 바짝 쪼여 들어갈 무렵, 번호를 외치는 소리에 우리 일행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딸~각 소리를 내는 문 앞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작은 방과 오픈되어 있는 약간 넓은 좌식 테이블에는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그득히 차 있다. 돼지고기 국산, 쌀 국산, 김치 국산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메뉴판이 없다. 여기저기 주일에는 쉰다는 알림글과 모자를 쓴 주방 아주머니, 그리고 CCTV는 하여간 낯설었다. 콩나물 무침, 깍두기와 김치, 마늘장아찌, 콩자반이 나왔다.

 “그렁께, 예전엔 이곳이 필시 식육점이었을 터, 자연스럽게 국밥을 팔았겠지, 그러다가 애호박을 만나서, 진정한 맛을 찾은 게지, 그나저나 이 봄날에 이 시골스런 식당에 겉절이 따위가 없다니 말이 되는가? 지천으로 올라오는 것이 또한 나물인데, 자고로 계절에 어울리는 진정성이 안 보이네.”

 기다리다 지친 남양 홍 씨는 콩자반을 꼭꼭 집어 입 속으로 가져가고, 콩나물을 먹다 마늘장아찌로 손이 가고, 깍두기로 입가심을 하면서 본 메뉴를 애타게 기다린다. 어느새 소진된 밑반찬이 눈앞에 펼쳐지고, 찬기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57번 대기 번호표를 손에 쥔 젊은 사내는 언제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올 기약 없이 딸깍 문을 열고 씩씩하게 나갔다.

 수북이 봉곳하게 올라와 있는 돼지고기와 듬성듬성 자리 잡은 애호박이 산처럼 다가왔다. ‘스뎅’ 그릇은 온통 시뻘건 육수로 철철 넘치고 있었다. 맨 꼭대기에서 알랑거리는 비계살코기를 우걱우걱 씹자마자 봄바람에 벚꽃 흩날리듯 스르르 입안에서 녹아들었다.

 “허~허, 아쉽네. 이렇게 맛깔난 고기를 시골 막된장에 발라서 고추와 마늘을 넣고 푸성귀로 막 몰고 가야되는디, 말일세.”

 기다린 보람이 있었을까? 군데군데 큼직한 애호박과 버섯, 양파들이 순식간에 거두어지고, 속살인 밥이 드러났다. 육수 맛은 약간 매운 맛이 돌기도 했지만 밥과 같이 먹으니 강하지 않고 자분자분했다. 입술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지색으로 물들어 갔다.

 딸깍거리는 문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도로변은 차량으로 줄지어 있고, 여전히 서성이는 사람들, 커피에 예술을 입히는 카페 ‘아팅스’는 명화동 주변의 색다른 모습이다. 명화동은 예전에 목화밭이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밝은 꽃’이라 불렸던 동네였다고 하는데, 이제는 애호박옛날국밥을 찾는 젊은 사람들 꽃으로 한껏 물이 오른 마을이 된 듯하다.

▶ 차림 : 애호박옛날국밥 8000원

▶ 주소 : 광주 광산구 명화동 225-4

▶ 연락처 : 062-943-7760

글·사진=장원익<남도향토음식박물관 학예연구사>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