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첫 삽…공사비 5억, 광주 1년 재정의 1/4

▲ 금남로_확장공사(1968년).도로 끝의 흰 색건물이 당시의 전남도청이며, 도로왼쪽의 한창 철거작업이 진행 중인 목조건물이 무덕전이다.

 광주시장이 노인환에서 장형태로 갑작스럽게 교체 뒤에 착수한 금남로 확장공사는 1968년부터 69년까지 2년간 진행됐다. 1968년에는 옛 전남도청에서 3가의 법원 앞까지, 69년에는 4~5가가 확장됐다. 그런데 기존의 금남로 폭이 12미터에서 30미터로 확장됨에 따라 도로 연변에 늘어선 건물들의 철거가 불가피했다. 철거는 도로 중앙선을 기준으로 좌우편으로 넓히는 방식이 아니라, 한쪽은 그대로 둔 채 반대쪽만을 넓이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그에 따라 건물 철거가 추진된 쪽은 지금의 전일빌딩 쪽이었다(당시엔 아직 전일빌딩이 세워지기 전이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전일빌딩 쪽만을 철거하기로 정한 것은 이쪽이 상대적으로 큰 건물이 없어 철거비가 적게 들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또 법원 등 상당수 건물과 부지가 정부 소유라 이것을 무상으로 양여 받으면 철거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작용했다.

 

도로 확장 위해 빚까지 내다

 그럼에도 확장에는 막대한 공사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금남로 확장에는 총 5억 원이 들었는데 당시 광주시의 재정규모가 연간 20억 원이 채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었다. 그리고 정부 지원 1억 원을 받더라도 나머지 4억 원은 광주시가 오롯이 부담할 처지였는데 세수입이 적은 광주로서는 채권발행, 즉 빚을 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상가아파트’의 건립이었다. 상가아파트란 요즘의 표현대로 하자면 주상복합아파트를 의미했다. 도로와 접한 아래층에는 상가를 두고, 그 위쪽은 아파트를 지어 이들을 분양해 그 돈으로 공사비를 벌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제수준으로 볼 때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벌충하려면 지으려는 상가아파트도 커야만 했다. 이에 따라 광주시는 상가아파트는 모두 2개 건물을 지을 생각이었고 하나의 건물이 2가와 3가를 각각 하나씩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러나 확장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무엇보다 건물 철거가 문제였다. 지금의 금남빌딩 자리에는 원래 중앙시장이 있었다. 이 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생겨나 주로 일본인 상인들이 입주했는데 일제 패망으로 그들이 떠난 뒤에는 한국인 상인들이 입주한 상태였다. 그런데 금남로 확장으로 시장 건물이 헐리게 된다는 소식에 입주 상인들은 생계문제 해결 전에는 건물 철거를 수용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 문제는 수개월 간 시당국과 상인들 간의 대립을 낳았고 가까스로 법원 이전으로 비게 될 땅에 임시 점포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양여 대신 부지 매각으로 가톨릭센터 들어서

 다른 계획도 차질을 빚었다. 처음부터 굳게 믿었던 계획 중 하나였던, 법원 부지를 정부로부터 무상 양여를 받겠다는 계획이 엇나간 것이었다. 광주시의 기대와 달리 정부는 이곳 부지를 무상양여 대신 민간에 매각했다. 부지는 광주은행과 가톨릭재단 등이 낙찰 받았는데 이것이 훗날 이 자리에 광주은행 본점과 가톨릭센터가 들어서게 된 배경이 됐다. 아무튼 이곳에도 초대형 상가아파트를 짓겠다던 광주시의 당초 계획은 물 건너가게 된 셈이 됐다.

 그럼에도 금남로 확장공사는 강행됐다. 공사 첫 해인 68년에는 도청 맞은편의 무덕전과 헌병대 건물, 그리고 금남로2가의 농협 광주지소 등이 철거됐다. 69년에는 법원 등의 철거가 마무리됐고 금남로 끝에 위치한 수창초교의 부지도 상당부분이 철거되어 교실이 부족해진 학교 측에서는 그 맞은편 공업관(뒤에 노총 지부 건물로 바뀜) 건물을 빌려 임시 교사로 사용해야만 했다.

 철거와 도로 확장으로 금남로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종전에 도청을 중심으로 T자 형태를 이루던 도로는 이제 새로 생긴 광장을 중심으로 Y자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의 옛 도청 앞 분수대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의 역사와 관련이 깊던 무덕전이 철거되고 그 자리가 광장으로 바뀌면서 그곳에서 뒤로 물러난 자리에는 지금의 상무관이 신축됐다.

 

도청 광장 편입과 전일빌딩 신축

 역시 학생독립운동 당시 도립사범학교 기숙사로 이용됐다가 이후 오랫동안 헌병대가 주둔했던 건물이 철거된 자리는 무덕전처럼 대부분 도청 광장으로 편입됐다. 반면에 새로운 건물도 등장됐는데 전일빌딩이 신축공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또 확장 공사 직후 옛 중앙시장 자리에도 상가아파트 신축공사가 착수됐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오늘날의 금남빌딩이다.

 한편 금남로 확장공사와 관련해 흔히 얘기되는 옛 중앙교회 앞에 있던 고목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공사 진행 중에 벌목된 것이 아니다. 이 나무가 베어진 것은 공사가 착수되기 1년 전인 67년의 일이다. 또한 도청 옆의 상공회의소 건물도 금남로 확장과정 중에 철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 건물은 현재 인쇄골목으로 불리는 옛 도청에서 전남대병원으로 통하는 일방통행로의 확장공사를 하던 71년에 철거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나무와 건물이 전체적으로 금남로 확장의 큰 그림 속에 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