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적으로 매달려 2년만인 69년 공사 마무리

▲ 확장공사 직전의 금남로. 가운데 신축 중인 건물이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이며, 그 아래쪽이 YMCA, 관광호텔 맞은편의 흰색 건물이 대한생명빌딩이다

 금남로 확장공사는 2년여에 걸쳐 진행됐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금남로는 이 공사에 의해 대략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도청 맞은편 무덕전이 철거되고 그 자리가 광장에 편입되면서 본래의 무덕전 자리 뒤편에 68년 지금의 상무관이 들어섰다. 상무관 옆 전일빌딩의 신축은 금남로 확장이 끝난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됐고 지금과 같은 건물로 준공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80년대였다.

 전일빌딩 옆에는 본래 확장 전 금남로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 중 하나인 대한생명빌딩(3층)이 있었다. 이곳에는 농협 광산지소도 입주해 있었는데 농협 측은 건물 철거로 이곳을 비워줬던 사실을 근거로 69년 광주역이 중흥동으로 이전하자 원래 역이 자리했던 대인동 부지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광주시와 농협 간에 설전이 오갔으나 결국 대의동에 광주경찰서(현재의 동부경찰서)와 함께 있던 소방서를 분리, 옛 광주역 청사를 리모델링해 소방서 건물로 사용하면서 일단락됐다.

 

현재 금남로, 발산교까지 2300미터

 

 한편 대한생명빌딩은 68년 확장 공사 직전에 철거됐고 현재는 도로 확장으로 줄어든 너비를 제외한 나머지 땅에 한국투자증권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이 블록에서 아래쪽으로 가면 확장 직전까지 있던 한국일보 전남지사 건물(3층)이 있었고, 다시 이 건물 불럭을 지나 지금의 5·18기록관이 입주한 옛 가톨릭센터 일대엔 68년까지 법원과 검찰청이 위치했다. 이 블록은 그 뒤편의 옛 현대예식장 자리에 있었던 법원 관사촌까지 포함해 꽤 넓은 면적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재판을 받은 장소이기도 했다.

 금남로 확장공사 당시, 광주시는 이 블록에 지금의 금남빌딩(구 동구청사 건물)처럼 큼직한 건물을 지어 주상복합아파트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지 소유주인 정부가 광주시에 양여하는 대신에 일반에 매각했고 이로 인해 훗날 광주은행 본점과 가톨릭센터가 들어선 계기가 됐다.

 대체로 이 지점까지, 다시 말해 옛 도청에서 5·18기록관 앞까지의 확장공사는 68년에 마무리됐다. 이듬해에는 5·18기록관에서 수창초교에 이르는 구간에 대한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이곳은 금남로1~3가에 비해 상대적은 큰 건물이 드물었다. 따라서 건물의 철거에 따른 갈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69년 완공 당시 금남로의 전체길이는 1700미터였다. 도로는 구 도청에서 시작해 수창초교에서 끝났다. 수창초교 옆, 즉 금남로 끝 지점은 당시만 해도 신역 쪽에서 오는 길과 광주천 쪽으로 나가는 길, 그리고 금남로가 만나 3거리를 이루었다. 그래서 ‘유동3거리’라 불렀다. 물론 지금은 같은 교차로를‘유동4거리’라고 부른다. 이곳이 3거리에서 4거리로 바뀐 것은 금남로 확장이 끝나고 20년이 흐른 뒤 수창초교에서 북성중학교 옆을 지나 양동의 발산교를 지나는 도로를 내면서부터였다. 이 공사는 사실상 89년에 착공했고 90년경 공사가 완료되면서 자연스레 유동3거리가 유동4거리로 바뀌게 됐다. 그리고 오늘날 금남로의 길이는 공식적으로 구 도청에서 발산교 앞에 이르는 2300미터를 가리킨다.

 

 확장 후 20년 간 인구 3배 증가

 

 확장공사를 마무리한 69년부터 금남로를 발산교 앞까지 연장하는 공사를 착공한 89년까지 20년 동안 광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광주인구는 69년 40만 명에서 89년 110만 명으로 거의 3배에 가깝게 증가했다. 경제규모도 커져 69년 확장공사 당시에는 1미터의 길을 닦는데 30만 원이 들었지만 89년 금남로 연장 때는 800만 원 이상이 소요됐다. 금남로를 오가는 차량 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확장 때 이 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하루에 고작 2000대에 불과했지만 89년쯤엔 거의 30만 대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마지막의 숫자에 주목해 금남로 확장이야말로 시대를 멀리 내다보고 착수한 공사였다고 평가한다. 대신에 금남로 확장으로 사라진 것들은 ‘부수적 피해’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앞으로도 시간을 두고 곱씹어볼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60년대 금남로 확장공사에 광적인 뭔가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공사는 광주전남의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앙으로 꼽히는 67년과 68년 가뭄 속에 진행됐다. 공사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69년 2월 대통령의 전남도청 방문 직전에는 횃불을 켜고 공사를 하도록 독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공사의 후폭풍이 컸다. 금남로 확장과 주변지역 개발을 위해 광주시는 엄청난 빚을 끌어다 써야했다. 전체 공사비 5억원 중 4억원이 빚이었다. 빚을 낸 것 자체가 큰 잘못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빚을 감당할 능력이 당시 광주시에겐 턱 없이 부족했던 데에 있었다. 그래서 금남로확장 뒤에 오랫동안 광주는 이 빚을 갚는데 온갖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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