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중국인들Ⅱ

▲ 1950년대 봉선동. 촬영_故 오종태 사진작가.

 중국인들이 전남에 들어와 채소 재배를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이전부터였다. 공식적으로 목포항이 개항한 것은 1897년.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보다 4년 앞서 이미 목포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들은 채소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광주 이주 중국인들 장사? 농업 뛰어들어

 그들이 처음 어떤 채소를 길렀는지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정확히 짚어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이 일찍부터 채소농사를 시작했다는 정황은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심지어 1903년 당시 목포항 감독관(무안감리)이던 김성규(金星圭)가 외부대신에게 보낸 보고문 속엔 지금의 목포시 대성동 일대에 사는 일부 중국인들이 양귀비를 재배하고 있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 기록은 목포의 중국인들이 처음부터 환금성이 강한 작물 재배에 큰 관심이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다.

 한편 192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 부락조사 보고’란 책에는 1922년 현재 목포에 사는 중국인 50여명에 대한 직업분포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포목점에 27명, 농업에 14명이 종사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무렵 광주에도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이주, 정착했다. 1917년 30여명에 불과했던 광주의 중국인들은 1922년 100명을 넘어섰다. 그들은 정착 초기부터 장사와 농사에 종사했던 것 같은데 농사는 주로 지금의 산수동, 지산동, 방림동, 봉선동 같은 근교지역에서 지었다. 이들 지역은 원래 황무지나 야산지대였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그들 특유의 근면함으로 이곳을 번듯한 채소밭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당시 그들이 채소농사를 위해 쏟은 공력은 대단했다. 심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똥오줌을 시내에서 거둬다가 채소를 길렀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임에도 콩기름을 먹인 종이로 지금의 온실과 같은 것을 만들어 채소를 기르기도 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도 그들이 매 끼니때 먹는 음식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밀가루 빵에 볶은 채소 한두 가지가 고작이었다. 당시 이를 지켜본 한국인들은 이런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열악한 조건 근면함으로 극복한 중국인들

 또한 그들은 대개 남자 홀로 허름한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다. 막노동자로 한국에 온 탓에 미처 배우자나 다른 가족을 데려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중국인들에 관한 통계를 봐도 이런 상황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22년 광주의 중국인 118명 중 남자는 110명, 여자는 불과 8명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29년에도 전체 중국인 302명 가운데 남자가 353명에 달할 정도로 극심한 성비 불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홀로 농사짓는 중국인들이 재배한 채소들은 실로 다양했다. 앞서 소개한 ‘조선 부락조사보고’ 등에 중국인들이 재배한 종류를 보면 마치 요즘 대형마트에 진열된 채소 앞을 지나는 기분이다. 시금치, 파, 미나리, 춘채, 유채, 가지, 오이, 참외, 토마토, 여름 무, 고구마, 감자, 무, 배추, 순무, 인삼, 우엉, 양파, 대파, 산마, 토란. 비록 이들 종류를 중국인들이 처음 이식 재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이를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재배한 채소를 긴 막대 양쪽 끝에 매단 바구니에 담아 충장로를 돌아다니며 팔았다. 편담이라고 부르는 이 막대를 어깨에 걸치고 그들이 찾은 곳은 충장로와 황금동 일대에 밀집한 고급 요릿집이나 일본인 살림집, 또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계림동 화교부지, 채소농사 중국인들이 기증

 반면에 한국인들은 이런 채소를 거의 소비하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요즘엔 김장용 배추의 대명사가 된 결구배추마저도 당시 한국인들은 전래의 반결구 배추에 비해 물기가 많아 씹는 맛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멀리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중국인 농부들은 한국인들과 접할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주로 농사만을 짓던 화교 1세대 노인들 중에는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어를 몇 마디 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중국인들은 처음부터 채소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벼농사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어느 민족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 전까지엔 벼농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중국 흑룡강성까지 벼농사를 처음 도입한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를 다 잘할 수는 없는 법. 특히 채소농사가 그랬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대부분 고향인 산동성에서부터 채소농사에 익숙했다. 지금도 산동성 수광 일대의 평야에는 비닐하우스가 드넓은 바다를 이룰 정도로 채소농사가 성하다.

 물론 이렇게 채소농사를 짓던 광주의 중국인들이 마냥 순탄한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1931년 길림성에서 농수로 문제로 한국과 중국인 농부들이 충돌한 이른바 만보산 사건과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의 여파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많은 중국인들이 광주를 떠났다. 그럼에도 끝까지 잔류를 결심한 중국인들은 그 뒤에도 계속 채소농사를 지었다. 1949년 개교해 작년에 폐교한 계림동의 옛 화교학교 부지도 원래는 이렇게 채소농사를 짓던 중국인들이 기증해 마련한 땅이었다고 한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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