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돼지를 맘껏 뛰놀게 한 자본, 그리고 숙명

 영화는 자본의 산물이다. 이런 이유로 감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될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들은 계획에만 그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인 ‘옥자’도 그럴 뻔 했다. 유전자조작으로 키워진 슈퍼돼지가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 도심을 거쳐 미국까지 이동하는 이야기는 500억이 넘는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력한 콘텐츠를 필요로 했던 온라인 유통 플랫폼인 넷플릭스는, 봉준호 감독의 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그 결과 ‘옥자’는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관객과 시청자들을 동시에 만나고 있다.

 '옥자'가 570억의 예산이 필요했던 이유는, 슈퍼돼지인 옥자를 CG(컴퓨터그래픽)로 구현해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상의 동물인 옥자가 영화 속에서 마음껏 활보하도록 했다. 감독의 이런 노력은 주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열이면 열, 옥자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퍼돼지를 영화 속에서 뛰어놀게 했던 자본은, 자신이 투자한 이상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옥자’는 다수 대중을 겨냥한 영화를 지향했다. 그러니까 ‘옥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 T’와 같은 영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동물인 옥자와 산골소녀 미자(안서현)의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다가, 끌려가는 옥자를 추적하는 액션 어드벤쳐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장르의 관습에 충실하게 연출한 점이 눈에 띈다. 옥자가 벼랑에 매달린 미자를 구해주는 장면도 그렇고, 트럭에 실려 가는 옥자를 미자가 추적하는 시퀀스들이 그렇다. 그리고 옥자가 끌려갈 때 ALF(동물보호단체)가 나타나 이를 저지하는 과정들은 이 영화가 상업영화의 충실한 문법을 따르고 있음을 입증한다.

 또한, 봉준호 감독은 영화 속에 깨알 같은 영화적 재치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관객들에게 유쾌한 재미를 선물한다. 옥자에게 날아오는 마취제 주사를 무지갯빛 우산으로 막아내는 장면, 한국어와 영어를 통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웃음, 1종 면허는 있지만 4대 보험은 없다며 투덜거리는 트럭운전수 청년의 자조 등은 봉준호 감독식 유머의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기존의 영화 속 장면들을 ‘옥자’속에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눈 밝은 관객들에게 발견의 재미도 선사한다. 옥자의 배 위에서 미자가 노는 장면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회색빛 시민들 속에서 붉은색으로 빛나는 미자를 부감쇼트로 잡은 장면은 ‘쉰들러 리스트’에서, 제이(폴 다노)가 스케치북을 넘겨가며 미자와 소통하는 장면은 ‘러브 액추얼리’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영화 좀 본다는 관객들은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최고 걸작은 아니다. 관객들은 결국 영화의 말미에서 동물 대량 도살 시스템과 자본의 약탈적 속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봉준호 감독의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유전자조작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기업의 탐욕을 고발하고,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동물을 학대하는 실상을 비판하고 있는 감독의 문제제기가 새롭다기보다는 철지난 주제라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여기에다 감독의 반자본주의적이고 친환경적인 관점의 영화적인 반영이, 치열한 인식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그럴듯한 명분의 도구로 호출되고 있는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옥자’의 현실 비판은 속 깊은 통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폼 나는 영화’를 위한 액세사리로 쓰인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슈퍼돼지 도살 시스템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이미지와, 우리에 갇힌 상태로 가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슈퍼돼지들을 부감 트래킹으로 잡아내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그 장면들을 통해 거두고자 했던 임팩트는 반감되는 것이다.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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