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민속박물관 내달 `광주장’ 기획전시

▲ 1900년대 광주 작은 장터. 오른편의 하천이 당시의 광주천이고그 위에 걸린 다리(서천교) 근처에서 1908년 겨울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내다보면 딱 한 가지 사실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가 있다. “뭔가를 소비했지. 그래 난 오늘 존재했던 것 같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가게에 들러 뭔가를 산다. 용케 담배 한 갑, 볼펜 한 자루를 사지 않고 지나가나 싶은 날에도 저녁 때면 식당이나 술집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사게 된다.

 24시간 편의점 때문에 이젠 뭔가를 사는 데에 시간의 구애도 받지 않는다. 예전엔 야간통금이 되기 훨씬 전부터 대개 상점은 문을 닫았다. 상점의 모습도 상당히 좋아졌다. 1960~70년대만 해도 시골이나 여느 도시의 주택가 골목길에는 고작 한 두 개 있는 ‘전방(廛房)’이 고작이었다. 그런 전방은 조촐했다. 과자 몇 봉지와 이런저런 생필품 그리고 포장지 색깔이 누렇게 뜬 담배 몇 갑이 놓여있는 정도였다. 늦은 오후면 동네 남정네들이 어김없이 전방 앞에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바람에 심부름으로 전방을 들어가려면 땀과 술이 뒤섞인 묘한 냄새 사이를 통과해야만 했다.
 
 우리에게 장은 무엇인가?
 
 이런 전방에 비해 장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곳이었다. 장은 소리부터가 달랐다. 다 살 수도 없었지만 마치 신발이나 사탕을 사라고 외치는 목소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또 어디선가 ‘쨍~쨍~’ 하는 소리가 나는 곳이면 필시 그곳은 낫이나 호미를 벼루는 대장간이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먹을 것도 꽤 많았다. 장은 닷새 만에 열렸다. 그렇다고 매번 장이 열릴 때마다 어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장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장에 가는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호사였다.

 또한 장은 왠지 모르게 할머니, 혹은 어머니만한 나이의 여성들이 가득한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거의 여성들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손에 쥔 고추보따리를 낚아챌 기세로 다가오는 여성들부터 눈에 익은 신발가게 아줌마, 심지어 떡 방앗간 딸까지 장엔 온통 여자뿐이었다. 그래서도 장이 더더욱 편했다고 느꼈다면 필자만의 기이한 추억 때문이었을까?

 그런 그 시절의 장은 무척 넓었다. 시간이 흘러 같은 공간을 찾을 때면 어린 시절에 봤던 장이 열리지 않는지 오래고, 그 장터가 기억 속에서만큼 넓지 않았던 사실에 놀란다. 이런 차이는 어디선 오는 것일까? 수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초등학교 운동장이 이토록 좁은 곳인지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와 비슷한 이유일까? 운동장의 크기는 예전 그대로인데 우리가 훌쩍 큰 이유 때문일까? 그렇다면 장에 대한 우리의 기억도 그런 이유는 아닐까? 1970년대의 장은 그 시절의 우리 삶을 둘러싼 경제규모의 반영이었다.

온종일 고요 속에서 땀 흘리던 농토에 비하면 장터의 크지 않는 소음도 크게 들렸고 매일 같은 얼굴만을 마주보던 동네와 달리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걷은 장터의 혼잡함은 참으로 이채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훨쩍 커진 세상에 비해 규모가 작았지만 돌이켜보면 거기에도 사람들의 삶이 깃들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빚 탕감과 결부된 생활고의 공간
 
 이번부터 몇 주에 걸쳐 필자는 광주장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마침 우리 박물관에서 오는 9월 개막을 목표로 광주장에 대한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기웃거리다 발견한 자료들을 추려 소개하려고 한다.

 광주장의 기원은 흔히 광주천에서 열렸던 작은 장과 큰 장 얘기로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는 지금의 부둥교 일대에 작은 장이, 광주교 아래쪽에서 큰 장이 열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광주장의 첫 출발이었을까? 또한 지금의 양동시장은 조선시대의 광주장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이 장소만 바꿔 광주천변의 장이 양동시장으로 이어진 것일까?

 무엇보다 장은 우리가 어린 시절 추억으로만 기억하는 그런 공간이었을까? 19세기 비아장 근처의 한 여인네는 다음날 무명베를 장으로 내다팔 생각에 졸음을 이기며 밤새 베틀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에게 장은 결코 우리가, 아니 필자가 경험했던 그런 낭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여인에게 장은 이렇게 짠 무명베를 내다팔아 지난봄에 빌려 쓴 돈과 곡식을 마련해야하는 처절한 생활고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그 장에서 빚을 얻어 쓴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광주 일대의 장에서 통용되던 사채(빚) 이자는 닷새에 2%, 연리로 따지면 146%나 되는 고리였다. 낭만의 공간은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의 잔인함에 버금가는 고통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일제는 의병장을 왜 장에서 처형했을까?
 
 또한 장터는 매우 정치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1908년 전북 순창에서 잡힌 의병장 기삼연이 하필 일본군에게 총살당한 곳이 작은 장터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우연이었을까? 그렇다면 1919년 광주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가 열린 곳도 같은 작은 장터였다는 사실도 그냥 우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궁금증이 죄다 속 시원히 풀리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이제 장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