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오일장

▲ 1920년대 광주역 구내. 왼쪽의 건물이 당시 광주역사로 지금의 대인동 동부소방서 일대에 있었다.
 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소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식료다. 아직 장이 태동하기 훨씬 전인 삼국시대에도 을불(乙弗)이라는 청년은 이곳저곳을 돌며 소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구려 미천왕이다.

 그런데 지금은 워낙 흔한 게 소금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해도 소금은 작은 황금이라 불릴 만큼 귀한 존재였다. 소금이 흔해진 것은 넓은 염전으로 상징되는 천일제염 덕분이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천일제염이 등장하는 것은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까지는 오로지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었고 이를 ‘화염’또는 ‘전오염’이라 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몇 가지 난점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바닷물을 끓이는데 막대한 연료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1900년대 신안군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윤식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소금 굽는 일로 불과 몇 년 만에 숲으로 울창했던 산 하나가 민둥산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1900년대 16만 톤 중 6만톤 전남서 생산
 
 이렇게 만들다보니 소금의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1900년대 전국에서 생산한 소금의 양은 연간 16만톤이었고 그중 6만톤을 전남에서 생산했다. 당시 인구가 1700만명 정도였으니 1인당 연간 10kg 남짓한 소금만을 소비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신안군 한 지역에서만 생산하는 소금만 연간 23만톤에 달한다.

 이처럼 생산량이 적다보니 소금 가격은 높았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부피만큼 무게도 상당해 수송비가 소금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럼에도 소금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골에도 꼬박꼬박 공급됐는데 여기엔 상인들과 오일장의 역할이 컸다. 그 일면을 100년 전 섬진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섬진강에는 수많은 배들이 오르내렸고 그중에는 소금을 실은 배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강을 오로내리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섬진강에서 제법 큰 배가 올라갈 수 있는 최종 지점, 즉 가항종점(可航終點)은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곡성군 압록원이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섬진강 하구인 광양에서 압록원까지는 물길로 50여km에 불과했지만 강 수위가 낮아지는 계절이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만 10여 일이나 걸렸다. 당시 돛단배로 제주에서 광양까지 오는 데만 10여 일이 소요된 점을 생각하면 강을 오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 수위가 낮아지면 수많은 모래톱과 암초를 피해 주섬주섬 수심 깊은 곳을 찾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압록원까지 올라간 소금만 한 해 동안 3000섬이나 됐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압록원에 도착한 소금은 이미 그에 앞서 훨씬 먼 거리를 여행했다. 당시에도 신안은 전국 소금의 약 20%, 전남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생산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한 신안의 소금은 흔히 ‘나주염’또는 ‘영산염’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도 전역으로 팔려 나갔다.

 이처럼 신안의 소금이 나주염 또는 영산염이라 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신안군 지역은 나주에 속한 섬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지금도 신안군에 속한 하의ㆍ장산ㆍ비금ㆍ도초도 등을 묶어 지도엔 ‘나주군도’로 표기돼 있다. 그리고 신안을 관할하던 나주는 그 주민뿐 아니라 그곳에서 생산된 소금도 관장했고 그래서 매년 거둔 소금이 영산포에 있는 창고로 운집되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나주 영산포에 모인 소금은 다시 중간상인들을 거쳐 호남 각지의 장터로 팔려나갔는데 이 소금 집산지의 이름을 따 나주염 또는 영산염이라 불렀다. 여하든 이들 소금의 일부가 바다와 강을 통해 하동, 구례, 곡성, 남원 등 섬진강 유역으로 공급됐던 것이다.
 
▲신안 소금이 나주염·영산염 불린 이유
 
 한편 영산강 유역에 속한 광주 사람들도 예로부터 이런 나주염을 먹었다. 1910년대의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광주장에서 거래되던 소금은 연간 600톤 남짓이었다. 그런데 종전까지 신안에서 뱃길로 영산포에 들어왔던 소금은 이 무렵이 되면 목포 ~송정리 간 호남선 철도를 통해 광주장까지 반입됐다. 1914년 간행된 ‘조선철도역세일반’이란 자료를 보면 이 무렵 송정리역을 통해 광주지역에 반입된 소금이 300톤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은 양이 여전히 소금 산지인 신안군에서 영산포까지 배로 실려 왔다가 영산포에서 하역한 뒤에 육로로 광주장까지 들어왔다. 당시 기록 중 광주에 들어온 소금의 출발지를 영산포로 기재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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