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소 거래 물꼬…우시장·떡갈비 등장 계기

▲ 초기 송정리역. 역구내에서 금봉산(현재의 송정공원) 쪽을 보고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즈음 광산구 송정리 사람들은 2km 남짓 떨어진 황룡강변의 선암장에서 장을 보곤 했다. 선암장은 꽤 역사가 깊은 장이었다. 적어도 18세기 기록에 나올 정도다. 흥미로운 건 처음 선암장은 장이 열릴 때마다 장터가 달랐다는 사실이다.

 18세기 기록에 따르면 2일에 서는 선암장은 황룡강 북쪽 강변인 선암동에서 열렸다. 대략 지금의 선운1지구 내 ‘구장터’라 불렸던 곳이 당시 2일 장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8일에 열리는 선암장은 황룡강 남쪽 기슭이자 당시 행정구역상 나주에 속했던 지금의 장록동에서 열렸던 것 같다. 이처럼 장날에 따라 장터가 바뀐 사례는 드물지만 다른 곳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이런 관행은 19세기에 광주 선암동으로 장터가 굳어지고 장날도 종전의 2, 8일에서 3, 8일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그러던 1912년 이 일대에선 변화가 일어났다. 나주 쪽에서부터 호남선 철도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호남선 철도는 나주~장성 간 최단경로를 따라 노선이 정해졌는데 전남도청 소재지인 광주시내와 가까운 곳에 정거장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광주시내 서쪽은 대부분 영산강변의 저지대라 침수 위험이 도사린 곳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송정리였다.
 
1912년 나주~장성간 철도 공사
 
 물론 송정리 역시 용진산과 어등산 자락을 흘러온 황룡강이 지금의 금호타이어 공장 자리에서 90도로 꺾이는 바람에 침수위험이 없지 않았다. 다만 비교적 높은 지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송정리역 자리였다. 역 주변이 대개 해발 10m인데 비해 이곳은 15m로 조금 높아 황룡강이 범람하더라도 얼마간 버틸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송정리역은 1914년 10월, 5만여 평의 부지에 여덟 채의 건물과 90m의 승강장을 가진 정거장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처음 몇 해 동안 이용하는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곧 화물집산지로 발돋움했다. 호남선 개통 2년 뒤인 1916년 광주시내에 반입되는 화물 1만5000톤 중 5000톤은 사실상 송정리역을 거쳐 들어온 것이었다.

 철도는 송정리 시내의 경관과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송정1, 2동 인구는 2만여 명에 육박한다. 하지만 송정리는 원래 한적한 시골이었다. 이 지역의 중심공간도 지금과 달랐다. 오늘날 송정시내의 중심부라면 광산구청나 송정리역 일대를 꼽을지 모른다. 하지만 송정리의 본바탕은 옛 송정여상(현 광주소프트웨어 마이스터 고등학교)과 원동경로원이 들어선 일대였다. 원동(元洞)이란 말에 이곳이 송정리의 본바탕이란 의미가 담겨 있지만 이것도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원래 원동은 고상(古上)이란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까지 고상마을은 수십 가구가 사는 조용한 농촌이었고 마을 동쪽에 제법 울창한 솔숲이 있어 별칭으로 ‘송정(松汀)’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어느덧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그런데 고상마을 사람들은 철도 개통 이후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상과 송정리역이 1km 떨어져 있다는 물리적 거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생업이 농사였다는 점도 철도개통에 담담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다. 반면 고상에서 송정리역을 잇는 신작로(현재의 광산로) 중간쯤에 있던 사창마을의 사정은 달랐다. 사창(社倉)은 본래 이 일대 사람들이 춘궁기에 대비해 곡식을 비축해놓던 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의 송정중학교 일대가 옛 사창마을 터다.

 정거장이 생기면서 사창마을은 발 빠르게 신흥시가지로 부상했다.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면서 그들의 자녀를 위한 소학교가 1914년 지금의 송정중학교 자리에 설립됐고 같은 해 송정면사무소도 근처에 세워졌다. 사창마을과 송정리역 사이에는 우체국, 경찰관 파출소 등도 생겨났다. 사창마을은 또한 서구 서창동을 거쳐 나주 남평을 잇는 신작로의 교차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인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이제껏 황룡강변에서 열리던 선암장이 폐쇄되고 대신에 사창마을로 이전해왔다. 이것이 훗날 송정오일장 또는 송정장이라 불리게 된 장인데 이런 이유에서인지 초기에 송정장은 소재지 마을 이름을 따서 ‘사창장’이라고 불렀다.
 
함경도산 생태, 송정역으로 들어오다
 
 철도는 송정장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 송정장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조선지지자료’(1919년)란 책자를 보면, 1917년 송정장에서는 주로 쌀, 소, 육류, 생어(生魚), 그리고 소금에 절인 생선을 뜻하는 염간어(鹽干魚)가 거래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쌀과 소는 철도의 직접적인 영향인데 같은 해 송정리역을 통해 쌀 4000톤이 목포와 군산 등지로 빠져나갔다는 다른 기록을 통해 그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송정리에 처음 생긴 공장이 정미소와 주조장이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소의 거래 역시 훗날 송정리 우시장과 떡갈비의 전조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생어와 염간어, 소금과 같은 수산물의 거래일 것이다. 우리는 송정장에서 이들 수산물의 거래규모를 알 수 없으나 대신 송정리역을 통해 그 시기에 들어온 수산물의 규모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1917년 한 해 동안 송정리역에는 염간어 1000톤, 소금 2000톤 그리고 선어 800톤이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송정리는 물론 광주지역 사람들이 머나먼 함경도의 명태를 값싸게 먹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철도와 장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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