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액 기준 큰장, 연 12만8000원
기능상 도매시장-동네 슈퍼로 역할 분담

▲ 1910년대 광주 큰 장터.
 광주장은 여러 차례 자리를 바꿔 열렸다. 본래 광주읍성의 북문 바깥인 지금의 충장로4가 일대에서 열렸고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광주천 쪽으로 이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적어도 18세기 후반엔 이미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분화됐던 것 같은데 어느 장이 먼저 광주천에 자리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20년대까지 존속했던 두 장의 위치로 보건데 큰 장은 광주 북문에서 한참 아래쪽인 공북루 일대(광주일고 근처)에서 열리다가 점차 광주천 둔치인 지금의 광주대교 일대로 확장된 듯하다. 반면에 작은 장은 지금의 세칭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에 있던 서문의 바깥인 부동교 일대에 있었다.
 
▲거래규모 따라 큰 장, 작은 장
 
 그렇다면 큰 장과 작은 장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아쉽게도 조선시대의 문헌엔 이들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는 단서가 없다. 1629년 광산현감 이유달이 광주관아의 오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대나무로 엮어 만든 갓의 일종인 패랭이와 말편자 같은 것을 만들어 장에 내다팔았다고 하는데 그 장이 큰 장인지, 작은 장인지도 알 수 없다(광주는 1624년부터 1634년까지 10년간 이괄의 난에 대한 여파로 광주목에서 광산현으로 강등된 상태였다). 또 1770년대 발간된 ‘동국문헌비고’ 중 전국의 장에 대한 목록에도 광주 큰 장과 작은 장은 개시일, 즉 장날만 기록하고 있을 뿐 장의 성격이나 차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1872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 큰 장과 작은 장이란 이름을 따로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장사의 편의를 위해 기둥만으로 초가지붕을 지탱하도록 만든 건물인 장옥(場屋)의 숫자로 장의 규모를 대략적으로나마 암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큰 장과 작은 장은 장의 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실제 두 장의 차이는 거래규모를 표시한 그 뒤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는 1919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17년 기준으로 큰 장의 거래액은 연간 12만8000원, 작은 장은 1만4000원이었다. 사실 이 자료보다 한 해 앞서 두 장의 거래액을 언급한 자료로 ‘광주지방사정’이란 책이 있긴 하다. 이 책에서도 큰 장의 거래액은 연간 11만8000원, 작은 장은 1만2000원이라고 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두 장을 구분하는 기준인 크다와 작다가 어디서 유래됐는지를 알 수 있다.
 
▲장에서 활발히 거래된 품목들
 
 거래액의 많고 적음은 두 장을 이용하는 지역의 범위와 관련이 있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시장’이란 책에 따르면 광주 큰 장에는 광주시내는 물론이고 나주, 장성, 담양, 화순 등지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자연히 장터 면적도 넓어 7200평이나 됐다. 반면 작은 장은 주로 광주시내권의 상인과 주민들만이 이용했고 장터 역시 2500평 정도로 작았다. 다시 말해 큰 장이 일종의 도매시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작은 장은 광주시내 사람들이 드나드는 동네 슈퍼마켓 같은 구실을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 장터에서 사고팔던 상품들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지지자료’는 큰 장에서 주로 거래되는 물품으로 쌀과 소, 생선과 육류 그리고 무명베와 목화를 꼽았고 작은 장터에선 쌀, 소금에 절인 생선, 육류, 무명베와 목화 그리고 채소가 거래됐다고 했다.

 쌀이 거래품목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쌀이 오랫동안 모든 먹거리의 왕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 일본으로 이출되는 대표적인 상품이었다는 시대상황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실제로 ‘광주지방사정’에 따르면 1916년 한 해 동안 광주에 반입된 7000톤의 쌀 가운데 5000톤이 일본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목포항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는데 이는 3만5000섬에 달하는 양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겠지만 1920년대 ‘소녀회’결성 등 항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한 장경례의 아버지 장봉익은 이 무렵 큰 장 일대서 쌀장사를 했고 훗날 북동 일대에 큰 도정공장(정미소)을 차리기도 했다.

 생선류는 주로 철도를 통해 송정리역을 거치거나 수운을 통해 영산포에서 하역했다가 다시 남평장을 거쳐 들어왔다. 현재 광주송정역이 보관하고 있는 ‘송정역사’란 자료에 따르면 1916년 송정리역으로만 생선류 1000여 톤이 도착했고 ‘광주지방사정’에 의하면 그중 300톤 남짓이 광주시내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장터 주변에 들어섰던 조면공장

 당시 큰 장과 작은 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됐던 품목 중 하나인 목화는 주로 광주와 그 인근인 담양과 화순 등지에서 반입된 것이었다. 훗날 충장로4가에 대형 포목점을 차린 이재홍과 심덕선도 당시 이들 장을 떠돌며 목화 장사를 했고 광주극장의 설립자인 최선진 역시 이 무렵 장을 오가며 쌀이나 가마니 거래와 함께 목화 취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당시 목화는 대개 씨앗이 포함된 상태로 출시됐고 이것을 중간상들이 매수해 조면공장으로 넘기면 씨앗을 뺀 솜 상태로 포장해 보다 큰 중간상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거래됐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장터 주변엔 도정공장 못지않게 조면공장이 들어섰다. 현재 광주대교 근처의 제일오피스텔이 들어선 자리도 당시엔 ‘광주조면’이란 이름의 꽤 큰 공장이 있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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