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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삶]영화 속 동물세상-‘파이이야기’의 호랑이
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는 초연함
최종욱
기사 게재일 : 2017-12-18 06:05:01
▲ 영화 ‘파이 이야기’ 중.
 호랑이는 밀림의 왕답게 여러 영화 속에서 악당 혹은 영웅으로, 자주 등장한다. 최근 호랑이가 거의 주연급으로 나오는 영화는 단연 ‘파이(π)이야기(2012, 미국, 이안 감독)’ 일 것이다. 소년 파이가 인간 주인공이라면 호랑이 리차드파커-실존 인물이었는데 표류 중 다른 선원들에 의해 살해되어 인육으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듯하다-는 동물 주인공이다. 파이가 호랑이를 관찰하고 길들이고 함께 표류한 관찰기이니 물론 인간 기준으로 보면 파이가 주인공이겠지만 파이가 줄곧 호랑이인 리처드파커 이야기를 회상하는 게 이 영화의 대부분의 줄거리이니 벵골호랑이인 리처드파커가 주인공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인도의 한 조그만 관광 어촌 마을인 퐁디셰리(Pondicherry)지방에서 조그만 사설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에게 경영난이 닥친다. 결국 동물원을 폐업하게 되고 동물원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정리하고 가족도 함께 동물들이 팔린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하고, 우선 파이와 그의 엄마가 호랑이를 비롯한 동물원 동물들과 함께 먼저 배를 타고 출항을 하게 되는데, 항해 도중에 그만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파이와 엄마는 겨우 다른 인간들과, 헤엄쳐 나온 몇몇 동물들이 함께 탄 구명보트에 가까스로 오르게 된다. 조그마한 보트에서 기약 없는 긴 표류가 계속되자 먼저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동물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벌어진다. 또 인간들끼리도 서로 살해를 하여 인육을 먹기도 하는 참담한 비극이 벌어진 끝에 마침내 호랑이 리처드파커 한 마리와 주인공인 파이 둘만이 배에 살아남게 된다.
 
한 배 탄 호랑이와 인간의 운명
 
 둘은 서로를 경계하다가 포식자와 피식자 간의 관계를 뛰어넘어 나중에 서로 마음은 열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사이가 되고 그 경계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물을 받아서 서로 나눠먹고, 날치들이 날아와 배에 무더기로 식량으로 쌓이기도 하고 무척 맛있는 바다거북을 잡아 나눠먹기도 한다. 신비와 알 수 없는 공포로 가득 찬, 수많은 미어캣들이 사는 이상한 섬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하다가 마침내 구사일생으로 사람이 사는 제대로 된 육지에 도달하지만 호랑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으로 사라져 버린다. 파이는 원주율 파이에서 딴 이름이다. 파이는 다신교를 신봉하는 철학적인 소년이다. 파이의 아버지는 늘 동물들을 다룰 때는 동물을 제압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호랑이와 인간 둘이서 한 배를 타고 표류한다는 이야기 전개는 무척 흥미롭고 스릴 넘치지만 내 안의 호랑이를 들여다본다는 것 같은 워낙 복합적인 철학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어 꽤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물론 CG작업을 통해 살아났겠지만 무서운 동물과 사람이 진짜 한 좁은 공간 안의 긴장관계 속에서 거친 호흡을 느끼는 듯하게 잘 만들어진 매우 완성도 높은 영화로 우리나라에서 파이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호랑이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평상시 본래 자기 사냥감이 아니고 위험이 되지 않으면 아예 간섭하지 않는 큰 동물 특유의 카리스마적인 이미지가 엿보인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배고픔이나 외로움도 의연하게 잘 참아낸다. 행동할 땐 과감히 나서 하이에나 같은 기회주의적인 동물을 단숨에 물어죽이기도 한다. 그와 함께 홀로 배에 남은 파이 역시 사냥감이 아닌 인간이고 자기를 괴롭힐 염려가 없는 데다 두려움에 떨고 있어 굳이 그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가끔 파이가 그를 위해 고기도 잡아주고 먹을 물도 만들어 준다. 그는 아무 감정이 없는 듯 묵묵히 그걸 받아먹는다. 환경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호랑이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삶을 끝나는 그날까지 살아갈 뿐이다. 내가 동물들을 대단하게 느끼는 점이 바로 그런 것이다.

종교나 믿음이나 일이나 노력, 유희 같은 굳이 부질없는 것들 붙잡으려 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 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는 초연함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호랑이에게도 분명 감정이란 게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커지기도 줄어들기도 한다. 단지 인간처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주인공 파이는 가슴으로 호랑이와 가까워짐을 차츰 느낀다. 그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 결국 호랑이가 옆에 있어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고 호랑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망망대해에서 그는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를 얻고 호랑이 역시도 파이의 호의를 알고 적의 없이 그를 대해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가 동물의 감정을 설명하긴 힘들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리차드파커를 통해 간접적으로 호랑이의 감정을 표현해 내고 관객도 은연중에 그 감정에 몰입하게 되는, 감성이 메말라가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경종을 울리는 깊이 있고 재밌는 멋진 생태 철학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슴으로 호랑이와 가까워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만들어진 영화로 ‘대호’(大虎 2015, 한국, 박훈정 감독)가 있다. 흥행보증수표인 최민식이 주인공으로 나와 반짝 빛을 발한 영화지만 흥행에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동물 나오는 영화는 좀 시시하고 그저 그렇지 않아!’ 하는 선입견들이 아직도 우리 정서 속에는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때 토호군을 만들어 한국 호랑이를 단지 고관대작들을 위한 전리품으로 멸종시키려는 일제와 이런 싹스리식 멸종만은 막아보려는 조선 최고 명포수의 투쟁과 몰락의 과정이 그려진다. 대호는 지리산의 산군으로 불리며 두려움이자 존경 그리고 정복의 대상이 된다. 그도 사냥꾼으로서 대호 사냥에 도전하고 싶지만 군대를 동원한 비겁한 몰이식이 아닌 일대일 대결을 원할 뿐이다. 물론 뻔한 결론으로 주인공은 대호에게 당한 아들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등 온갖 시련을 겪은 끝에 대호와 주인공 둘만의 마지막 대결을 벌인 후 둘은 결국 한 치 양보할 수 없는 죽음의 길을 함께 떠나게 된다.

실제 호랑이의 CG 기술도 매우 훌륭하고 역사적 진실에 바탕에 둔 스토리 전개도 의미 있고 민족의 상징이라는 우리 호랑이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여러모로 유익한 생태역사 영화였지만 조용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내겐 이런 야심찬 동물영화에 대한 도전들이 번번이 좌절되면 다시는 누가 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까 노심초사하게 만든 아까운 수작이었다.
최종욱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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