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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농민들 장터에서 사채 끌어다 쓰다
장과 금융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7-12-20 06:05:01
▲ 한때 영산강 최대의 오일장으로 통했던 남평장. 1900년대에 촬영된 것이다.
 오늘날 광산구 ‘첨단지구’로 부르는 택지지구의 상당부분은 과거에 ‘비아면’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엔 오래전부터 ‘비아장(飛雅場)’으로 알려진 오일장이 열렸다. 비아장은 종종 ‘아산장(雅山場)’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름이야 어떻건 이 장은 지금도 1일과 6일이면 첨단지구와 장성군 남면 경계선에서 열린다.

 19세기 말엽 비아장과 멀지 않는 곳에 박노면(1860~1913)이란 선비가 살았다. 광주지역을 벗어나면 그 이름을 아는 이들이 드물 정도로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선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19세기 말엽엔 한학을 한다는 게 그렇게 존경을 받거나 주목을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평생 배우고 익힌 게 한학이었던 터라 이 선비는 여러 편의 시와 글을 남겼고 이것을 모아 후학들이 ‘상고헌유고’라는 문집을 펴냈다. 한 번도 활자로 간행되지는 못했던 것 같은 이 문집은, 그래서 필사본으로만 전해진다. 이 문집엔 아산장, 즉 지금의 비아장을 배경으로 하는 ‘방가(紡家)’즉 ‘길쌈하는 집’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집집마다 봉창엔 불빛이 켜져 있고
 아이들은 웃음꽃 피우는데 아낙들은 실을 잇고 있네
 날이면 날마다 사채(私債)며 세금이며 독촉이 심해 가는데
 아산장(雅山場)의 무명베 값은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시과전 연리 146%, 체끽전은 73%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사족을 보태자면 19세기 말엽 근근이 무명베를 짜 장에 내다팔고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세금을 내며 살아가는 삶을 읊은 것이다. 그런데 박노면이 이 짧은 시에서 당시 농가생활의 실상을 죄다 담기는 어려웠겠지만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에는 당시 수많은 농민들이 장터에서 사채를 얻어다 쓰고 있던 현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장에서 빌려 쓰는 돈을 장변(場邊), 시변(市邊) 또는 ‘장질’이라고 했다. 19세기 말엽 광주에서 장변이 성행했을 것이란 짐작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처럼 동네마다 크고 작은 금융기관 점포가 들어선 시대가 아니었던 터라 장터는 중요한 서민금융기관이었다.

 그런데 장변은 요즘의 금융관행과는 많은 점이 달랐다. 우선, 빌린 돈은 요즘처럼 한 달이 아니라 5일 간격으로 나눠 갚았다. 장날 때마다 원금과 이자를 분할 상환해야 했다는 뜻이다.

 또한 장변의 금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비쌌다. 19세기 말엽 광주지역의 장변 이자가 얼마나 됐는가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유추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는데 1911년 오까자끼(岡崎遠光)란 일본인이 펴낸 ‘조선금융 급 산업정책’이란 책이다. 이 책엔 광주의 시과전(市過錢)과 체끽전(替喫錢)이란 두 가지 금융상품, 즉 장변을 소개하고 있다. 시과전은 1원을 빌리면 닷새마다 2전씩, 체끽전은 1원을 빌려 5일마다 1전씩을 갚아야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시과전은 연리로 환산하면 146%, 체끽전은 73%에 달하는 금리의 상품이었다.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이것을 고금리라고 여기긴 했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살인적이라고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시대 공식적인 대출이자는 연리 10%였다. 19세기 전주감영이 춘궁기에 빌려주고 가을에 회수하는 대출상품인 환곡의 이자도 이 수준이었고, 비슷한 시기 광주관아의 공식적인 대출이자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서민들이 이렇게 ‘낮은’이자로 관아에서 돈이나 곡식을 빌려다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빚을 주는 쪽, 즉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돈을 떼일 염려가 없는 경우에나 이런 저리대출을 했을 것이다.
 
▲고금리 횡행하던 장변, 돈놀이도 성행
 
 반면에 통상적으로 일반서민들이 무는 대출이자는 그보다 높은 수준에서 책정됐던 것 같다. 일찍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돈놀이를 해서 연리 30%를 받는다면 이익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황해도 지방에서는 월 30%(연리로는 360%)의 이자놀이도 버젓이 성행한다며 연리 30%의 돈놀이를 옹호한 바 있었다. 또한 장변이 핫머니처럼 단기대출상품이었으므로 금리가 셀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저금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연리 수십, 수백 퍼센트는 놀라운 금리임에는 분명하다.

 이처럼 고금리가 횡행하던 장터의 모습은 장을 낭만적으로 보려는 우리네 감정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장을 다룬 학술적인 논문에서조차 고금리의 장변에 대해서는 좀체 거론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쪽짜리 모습으로 장터를 온전히 그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장터의 현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부모로부터 몇 푼 되지 않는 유산으로 당대에 거부가 됐다는 수많은 장꾼이나 부호의 신화 같은 얘기를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한 신문에 의하면, 1930년 전국에는 1만2000여 명이 돈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중 전남에만 3000명이 있었으며 3000명 중 조선인도 2000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들이 모두 장터를 무대로 돈놀이를 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무렵 장변이 여전히 돈놀이의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었음을 생각하면 상당수는 장터에서 돈놀이를 했을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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