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혼재, 입체적 인물상 제공

 영화는 낡은 3개의 옥외광고판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내 이 광고판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채워진다. “내 딸이 강간당하면서 죽었어.”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고?” “윌러비, 어떻게 된 거지?”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윌러비는 경찰서장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강간범에게 딸을 잃은 어머니는 경찰을 상대로 도발적인 광고를 내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이 영화가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분투로 흘러갈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도 아니라면 딸을 억울하게 잃은 엄마가 강간범을 찾아나서는 복수극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는 관객들의 예상을 배반하며, 인간을 연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선과 악이 혼재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관객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주인공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만 해도 그렇다. 밀드레드는 딸을 강간한 후 불태워 죽인 강간범을 찾아내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로 그려지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딸을 찾겠다는 이유는 복잡다단하다. 딸이 죽던 날 딸에게 퍼부었던 폭언이 못내 걸리기도 하고, 범인에 대한 분노는 물론 범인을 잡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원망 등이 두루 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밀드레드는 자신의 심란한 심사를 광고판에 투영해 세상에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밀드레드는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 안의 울분을 삭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밀드레드의 이와 같은 해결방식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직접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밀드레드의 광고판은 이내 불타버리고, 밀드레드는 더 큰 폭력의 유혹에 노출되며 폭력의 악순환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밀드레드의 거울로써의 인물은 경찰관 딕슨(샘 록웰)이다. 집에서는 어머니 말에 꼼짝 못하는 착한아들이지만, 밖에서는 인종차별은 물론 경찰관 뱃지의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밀드레드의 문구를 광고해 준 광고업자 웰비를 폭행하고, 광고판을 불태운 것은 밀드레드와 다를 바 없는 폭력으로서의 대응이다.

 이렇듯 두 사람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인물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과격하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정의로움을 추구할 수도 있는 보통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들 두 사람과 비교되는 인물은 윌러비(우디 해럴슨)다. 경찰서장인 윌러비는 췌장암 말기로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앞당겨 책임을 지는 모습은 숭고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윌러비가 죽음 직전에 밀드레드와 딕슨에게 보낸 편지는 죽음의 무게가 실려 있기에 진정성이 담보된다. 밀드레드에게는 범인이 잡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았고, 딕슨에게는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한다는 충고를 남기며 증오를 멈출 것을 주문한다.

 이렇듯 윌러비의 메시지는 자기 것 밖에 알지 못했던 밀드레드와 딕슨을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하고, 딕슨은 자신의 편견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인물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쓰리 빌보드’는 옥외광고판에 새겨진 세 개의 문구를 발화점삼아 요지경 세상을 확장시켜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을 예감케 하는 영화다. ‘마틴 맥도나’라는 이름을 기억해 보도록 하자.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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