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주의 오월 시 ‘목련이 진들’ 이야기2

▲ 1990년 박용주 모습. 전남 순천 효천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인 듯싶다.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박용주는 이 시를 1988년 4월에 써 그해 전남대학교 용봉편집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오월문학상’을 받는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박용주는 1973년 광주에서 나고 1980년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주 오월을 겪은 것이다. 198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금남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얼마 안 되어 학교를 그만둔다. 1987년, 전남 고흥으로 집이 이사를 가고 그곳 풍양중학교에 다시 입학하는데, 그 이듬해 1988년 2학년 때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에 응모해 대상을 받는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첫 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장백)가 세상에 나온다. 박용주는 시집 앞에 제법 긴 머리말(‘글을 내면서’)을 써 붙인다.

 가위 눌린 듯 가슴이 답답하고 끝없는 좌절만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프고, 외롭고, 이런 조금은 달콤한 감정을 느끼기에 앞서 힘겨운 생존이 먼저였을 때의 막막함과 칙칙한 절망감은 꿈에라도 다시 생각날까 두렵습니다.
 갑작스런 환경의 뒤바뀜은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었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었습니다. 날짜 지난 신문 한 장이라도 눈이 띄면 음미하듯 아껴 읽었고 백지에 글자가 인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읽었던 때, 나는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가끔 혼자 울었습니다. (……) 학교마저 쉬어야 하는 절박한 생활 속에서 86, 88의 신화는 또 하나의 아픔이었습니다. (……) ‘문학’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꿈도 못 꿨고 알지도 못할뿐더러 시인이 되고 싶다는 기대도 바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 허기로 쓰러져 본 적도 있는 가슴 추운 사람들, 정님이 같고 김노인 같은 쓸쓸한 사람들에게 한 번쯤 읽혀질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86, 88의 신화”는 86아세안게임과 88올림픽을 말한다. 그 무렵 전두환 군사정권은 우리나라가 아세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를 만큼 국력이 올랐고, 이 두 행사를 잘 치르면 곧 선진국이 될 것인 양 광고를 하던 때이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학교마저 쉬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허기로 쓰러”지기도 했다. 위 구절을 보면 1986년 학업을 중단한 것도, 고흥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도 집안 사정 때문인 것 같다. 어린 소년은 “끝없는 좌절”과 “막막함과 칙칙한 절망감” 속에서 언제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가끔 혼자 울었”다고까지 한다.

 그는 머리말에서, “편모슬하, 결손가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조금의 잘못도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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