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주의 오월 시 ‘목련이 진들’ 이야기3

▲ 박문옥의 음반 ‘양철매미’. 1992년 박문옥은 박용주의 ‘목련이 진들’에 곡을 붙인다. 이 노래는 그의 음반 ‘양철매미’ 첫 번째 곡이고, 지금 바로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그의 시에는 어머니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아버지를 노래한 시는 ‘하직인사’ 한 편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관을 하고 마지막 절을 올릴 때 / 나는 일곱 살, 동생은 두 살이었지요 // 묘역 곳곳에 빨갛게 피어난 사루비아와 / 자꾸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지요 (……) 청명한 구월 그날의 하늘은 / 별나게 푸르러 눈부셨지요 // 나는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묻고 (……) 올 때마다 가슴에 쌓이는 것은 설움이요 / 돌아서는 발걸음은 납덩이인데 (……)”(1989년 2월)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일곱 살’이라면 세는나이로는 여덟 살이고 1980년이다. 시에서는 망월묘지 곳곳에 샐비어가 빨갛게 피어난 “청명한 구월”에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모셨다고 한다. 샐비어 꽃은 7월 하순부터 가을 서리가 올 때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5월이 아니고 9월이 맞기는 하지만 ‘목련이 진들’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시가 암울한 80년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죽음과 1980년 5월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망월묘지가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80년 5월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을 심사한 김준태 시인은 박용주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작품의 내용, 작품의 형식은 가히 놀라웠으며, 만약 그 작품들이 진정 중학생의 작품이라면 우리는 해방 후 비로소 천재 시인을 만났음을 말할 수 있으리라. 자아, 보라. 5월을 얼마나 절실하게 읊고 있는가를!”

 그때만 하더라도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은 주로 전국 대학생들이 응모를 했다. 그런데 1988년 시골 한 중학생이 응모하고, 또 당당히 당선작으로 뽑혔다. 아주 놀라운 사건이었다. 전남대학교 과학생회실에는 대자보에 매직으로 쓴 그의 시가 붙었고, 읽는 이마다 “놀랍다!” “감동이다!” 같은 말을 한마디씩 했다. 오월 관련 시민단체 어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어느 카페에 이 시를 올린 적이 있는데, 한 회원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제가 박용주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어린 나이인데, 박용주 시집을 가방에 넣고 전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어요. 첫 가출 결심을 박용주 시인 때문에 한 거죠. 가서 밥을 지어 주며 살고 싶었어요. (그땐 밥 짓는 방법도 몰랐지만) 누군가의 시를 읽고 그 사람에게 시집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요. 지금도 우리 집 책장 어딘가에 시집이 있을 텐데. 오랜만에 이 시를 읽으니 가슴이 짠하네요. 이후 그의 다른 시가 나오기를 무척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더군요.”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박용주는 널리 알려졌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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