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어쨌든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은 내가 5월 광주로부터 도피했다는 사실이다. 난 지금도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싶다. 그래야만 내가 나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총을 든 채로 도청 부근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 난 어쩌면 살인자다. 그 마지막 날 밤 자정 부근, YMCA에서 잠들어 있던 백여 명의 청년들을 도청으로 데려다주고 난 다시 Y로 돌아와 총을 들고 이층 한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책상 밑에 엎드려 있었다. (……) 난 그렇게 한두 시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문득 도망쳐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박효선전집3-일기·수기’(황광우 엮음, 연극과인간, 2016), 51∼52쪽
그날 밤 27일 도청 전투에서 ‘금희의 오월’ 주인공 이정연도, 윤상원도, 박용준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말한다. “난 지금도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싶다”고. 그가 도청을 나온 것은 사실이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는 이 진실을 피하지도 애써 부정하지도 않는다. 1998년 9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아니 살아 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80년 오월의 현장을 떠난 본 적이 없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부끄러움이 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27일 그날 밤, 한 여인의 처절한 방송이 있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도청 앞으로 나와 광주를 지킵시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근 김선옥(56) 씨로 밝혀졌다. 그는 그때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또 골목 방송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도청 옥상에 걸린 확성기가 고성능이어서 도청 둘레 10킬로미터 안 사람들은 이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광주 시민들은 김선옥 씨의 울부짖는 호소를 들으며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없었다. 당장 나가야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