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5000년을 산 백두산 호랑이<3>

▲ “용감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렸거든.” 5000년을 산 우리 호랑이는 또 누굴 만났을까?
 고구려가 비록 망하긴 했지만 용감한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쉽게 항복을 받아들일 수 가 있었겠니! 항복을 거부한 고구려 유민들이 한데 모여 지금의 만주 땅에 세운 거대한 국가가 바로 발해였지. 나 역시도 고구려 멸망 후에는 한 동안 고구려 아래 땅으론 내려가고 싶지 않아 안시성을 지나 요동 땅을 거쳐 잠시 중국 대륙 여행을 하고 있었지. 중국 대륙 곳곳에도 우리 백두산 호랑이와 비슷한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지.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에 사는 호랑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체구들이 작았어. 그래서 백두산 호랑이가 한 번 나타나면 중국 호랑이들은 여기저기 숨기에 바빴지. 그 중에 한 녀석을 잡아다 “너 혹시 고구려 사람들이 어디에 모여 사는지 알아?” 하고 조금 무섭게 물어 보았지. 그는 한참을 큰 소리로 “어흥 어흥”하며 다른 산의 동료들과 신호를 주고받더니 드디어 내게 그들이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더군. “고맙다! 그리고 난 잠시 여행 중이고 곧 우리나라로 돌아 갈 테니 너무 걱정들 하지마라”하고 돌려보냈지.

▲“이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모르고…”
 
 그날 밤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산다는 ‘천문령’이란 산골 깊숙한 마을 근처로 몰래 접근하고 있었지. 그런데 마을 어귀 작은 언덕배기에 제법 위엄 있게 생긴 청년 하나가 구슬픈 곡으로 피리를 연주하고 있더군. 무언가 그에게 사연이 있겠다 싶어서 그의 앞에 조용히 내 모습을 드러냈지. 역시 그도 고구려의 후손 이어서였을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못했을 텐데, 그는 옆구리에 찬 단검을 순식간에 꺼내더니 나와 한 판 붙을 자세를 취하더군.

 내가 거리를 두면서 발톱을 오무리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자 그제서야 그도 단검을 내리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더군. “난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라고 한다. 미안하게도 내가 피리를 불어 너의 잠을 깨운 모양이구나. 이 땅에 우리가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땅의 진정한 주인들이 누군지 잘 몰랐구나. 너도 혹시 이 땅의 본래 주인들 중 하나라면 우리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우리에게도 땅을 좀 편안히 나누어 주지 않을래?”

 난 짐짓 알았다는 표시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우고 꼬리도 살살 흔들어 주었지. 난 직감적으로 그가 앞으로 큰일을 해낼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만난 이 후, 주변의 오랑캐 땅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면서 예전의 고구려 땅보다도 훨씬 거대한 나라를 그것도 중국 한 복판에 만들어 놓았어. 그 곳이 바로 발해라고도 하고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리는 우리 민족 역사 중 최대의 거대한 나라였지.

 그러나 발해는 겨우 200년 정도까지만 번성하다가 결국 주변 오랑캐들에 의해 멸망하는 비운을 맞게 돼. 그 땅이 만일 아직도 우리 땅이라면 이 땅의 호랑이들도 그리 쉽게 멸종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고려시대 때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 때였어. 그때 풍문을 들어보면 왕을 비롯한 힘없는 신하들은 그저 항복하고 자기 목숨부지하기에 바빴는데, 그 와중에도 배중손, 김통정을 같은 무신들은 삼별초를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하기로 다짐을 했대. 그 삼별초의 대장격인 배중손을 만난건 그들이 강화도의 싸움에서 패하고 진도로 내려가는 길목에서였어.

 그땐 온 나라가 전쟁터여서 나 역시도 혼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고, 혹시 그 길에 그들을 만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도 하고 있는 중이었지. 용감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렸거든.

 그러던 어느 날 무장을 한 한 무리 사람들을 보게 되었지. 그 날 저녁 그 중 누군가 잠 못 들고 일어나서 내가 쉬고 있는 경치 좋은 절벽 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리더군. “산신령님, 제발 이 전쟁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그래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오랑캐의 발밑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더군.

 들어보니 나 또한 가슴이 찡한 거야. 그래서 조용히 등 뒤로 다가가서 살짝 땅바닥을 긁어서 인기척을 내었지. 그러자 뒤를 돌아다본 배중손 장군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 한 걸 간신히 이빨로 옷깃을 붙잡아서 구해내었지. 좀 미안하더구나. 전혀 해칠 의도가 없었는데 말이야.
 
▲삼별초의 대장 배중손과 동행하다
 
 그래도 내가 자기를 구해 주고 해칠 의도가 없는 걸 안 배중손 장군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나를 지긋이 바라다보더군. “아! 산신령님이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당신을 제게 보내주셨군요. 앞으로 당신을 제 마음에 표상으로 깊이 새기고 더욱 힘을 내어 오랑캐들을 무찌르는데 앞장서겠습니다.” 하길래. 나도 모른척하고 그 맹세를 받아들이는 듯한 의미로 발톱을 숨긴 앞발 하나를 그의 앞으로 쑥 내밀었지. 그는 그 발을 두 손으로 굳게 마주 잡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더군.

 그날 저녁 이후로 난 진도를 향해 그들이 배를 타고 건너갈 때가지 동행하며, 낮에는 추격하는 고려군과 오랑캐들을 다른 길로 따돌리기도 하고 갑자기 군사들 가운데 파고들어 일부러 소란을 피워 적의 위치를 알려주기도 했지. 그리고 저녁엔 배중손 장군의 근처에 머물면서 끝까지 그의 힘이 되어 주었지. 그는 가끔 나를 자기 막사 안으로 초대해서 술과 고기를 대접해 주고 취해서 나를 배고 자기까지 했어.

 그 후 난 땅끝 마을 해남의 두륜산으로 들어갔고 그는 거기서 배를 타고 진도로 건너갔어. 들리는 소문으론 삼별초군은 제주도와 진도를 오가며 끝까지 항전하다 고려군과 몽고군 연합군에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해. 그러나 비굴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 그들의 영웅적인 항쟁은 나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 속에 남아서 기어이 이 나라에서 몽고군을 모두 몰아내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지.
최종욱 <우치동물원 수의사>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