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000년을 산 백두산 호랑이<4>

▲ “대왕은 궁정의 화원 몇몇을 은밀히 불러 나를 모델로 호랑이 그림을 그리도록 했지. 그 전에 호랑이 그림들은 대부분 중국풍의 상상화뿐이었어.”
 조선시대에 와서는 꽤 여러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지. 특히 나는 조선의 왕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궁궐에 저녁에 몰래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가 보기도 했어. 그러다 한 번은 궁녀에게 들켜서 궁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난리가 나기도 했지. 사람들 주변에서 꽤 오래 살다보니 그 무렵에는 진짜 사람들을 감별하는 눈도 좀 생겼지. 세종대왕 시절에 가끔 저녁 늦게 궁을 넘어가서 지켜보면 왕과 신하들 모두 밤늦게까지 연구도 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 또한 남다른 것 같았어. 그래서 나는 ‘언제 기회가 오면 세종대왕 그를 꼭 한번 직접 만나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세종대왕이 충북 청원군의 ‘초정리약수터’로 눈병을 고치러 가시는거야. 나도 몰래 그 행차의 뒤를 따라갔지. 어느 날 이른 아침 약수터에서 혼자 물을 마시고 있는 그를 보고, 난 소리 없이 다가가 그 옆에서 약수터 물을 일부러 소리 내어 홀짝였어. 소리를 듣고 옆을 바라본 대왕은 나를 발견하고 잠깐 놀란듯 하더니 이내 “호위 군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목숨 부지하려면 냉큼 물러가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시더군. 역시 큰 사람은 확실히 어디가 달라도 달랐어.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데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용기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아무튼 그가 이 땅에 최고 임금님인건 분명하니 나도 뒷다리를 낮춘 채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지. 그러자 대왕은 말없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군. 그 후로 그가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우리는 매일 밤 만났고 난 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 그도 꽤 고민이 많더라고. 신하들과 양반들이 그의 한글창제를 적극 반대하고 있고, 중국 명나라에서는 그의 새로운 군사, 천문에 관한 발명품들을 마치 자기나라에 대항하는 걸로 간주하여 매우 싫어하고 있다고 했어.

 그에게서 고민을 들어 주는 것 이외에 내가 특별히 도울 건 없었지만 그가 내 큰 입 속을 보고 싶어 하면 언제든 입을 열고 속까지 훤히 보여주었지. 그때 그는 가끔 “그래 바로 이거구나”하고 감탄사를 내곤 했는데, 후에 보니 내 입모양에서 한글 기호 몇 개를 찾아낸 것이었어. 또 대왕은 궁정의 화원 몇몇을 은밀히 불러 나를 모델로 호랑이 그림을 그리도록 했지.

 그 전에 호랑이 그림들은 대부분 중국풍의 상상화뿐이었어. 하지만 그것도, 집안의 액운을 쫓는다는 미신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꽤 인기가 있는 그림이었지. 화원들은 나를 처음 보자 기겁을 하여 도망갈 듯하다가, 대왕이 염려 말고 그냥 자세히 보고 천천히 그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벌벌 떨면서 그림을 그리더군. 그 때 그린 호랑이 그림 몇 장을 토대로 호랑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궁중 화원들 간의 오랜 전통으로 굳어졌지.

 조선시대 김홍도와 심사정 등이 그린 유명한 맹호도는 바로 이 몸이 본래 모델이었지. 그래서 두 그림들은 서로 많이 비슷하지. 이 사실은 너에게만 처음으로 밝히는 거야. 혹시 내가 생각난다면 그 그림들을 한 번 찾아서 보도록 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동물인 나도 무척 존경하는 분이었지. 전쟁이 나기 몇 년 전에 활을 가지고 멧돼지사냥 나온 그를 산에서 한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어. 그는 그 때 약간 다리를 저는데다 활 한 대로는 나의 적수가 안 된다는 걸 이미 간파했겠지만 끝까지 활을 내려놓지 않더군. 내가 보기에 그도 바로 용감한 한 마리 호랑이 같아 보였어. 우리 동료를 만난다는 건 나에겐 늘 기쁜 일이지.

 그날 난 일부러 그에게 등을 보이며 물러섰지. 아마 그도 내가 적의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약점을 보이는데도 활을 쏘지 않더군. 그 후 난 그의 다리가 회복되는 동안 거의 매일 사냥터에서 그를 마주쳤고 서로 사냥감을 몰아다 주는 사이로까지 발전했지. 그게 인연이 되어 임진왜란 때도 늘 그의 가까이에 머물며 왜적들의 본진이 있는 곳 숲 근처에서 왜적의 동태를 살펴서 그에게 매번 알려다준 스파이가 바로 나이기도 했지. 그에게 알려줄 때는 주로 땅바닥에 발톱으로 그림을 그려주거나 그를 지름길로 이끌고 가서 비밀리에 함께 정찰을 하게 하기도 했지. 그 많은 왜적을 그 적은 군사 로 상대할 수가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적의 움직임을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나 같은 첩보원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고 보면 꼭 자랑은 아니지만 임진왜란의 숨은 승리의 주역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도 할 수 있지.

 한번은 그가 육지에 상륙해서 싸울 때 등 뒤에서 장군에게 칼을 내리치는 적을 단번에 물어 죽인적도 있어. 그리고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될 때는 나도 옆에서 몰래 그를 호위하기도 했지. 그러나 비록 내가 그를 좀 도와준 것 사실이었지만, 장군 역시 스스로 정말 용감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거야. 이순신 장군이 아쉽게도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죽었을 때 나란 존재도 자연스레 잊혀져 버렸지. 그가 죽던 날 난 산위에서 호송돼 오는 그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큰 소리로 슬피 울었는지 몰라. 그는 장군이기 이전에 바로 내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였거든.
최종욱<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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