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성보다 디자인 고집한 조선 사기장

▲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왼쪽)와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조선 16세기 높이 41.3cm. 국보 제166호. 철화백자란 철분이 많이 들어 있는 밤빛 흙을 이겨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둘러 구운 백자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왼쪽 그릇 밑굽 무늬를 ‘파도무늬’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파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 때부터 그릇에 그린 타원형 비구름이다. 비구름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는 우운화생(雨雲化生)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국립중
 조선시대 사기장도 여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다 남자들이었다. 조선 이전 삼국, 신라, 고려시대에도 그릇 빚는 장인은 대개 남자였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이 구워 냈던 그릇을 보면 여성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릇을 쓰는 여자의 처지에서, 그 ‘편리성’을 기준으로 놓고 조선시대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를 보면 한마디로 불편하고 위태위태하다. 높이가 53.8cm나 되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 항아리다. 그런데 바닥 밑 지름은 고작 19.1cm밖에 안 된다. (남자의 손 손목 관절까지 길이가 보통 20cm 안팎이다)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넘어질 것 같은, 그런 불안한 디자인이다. 그렇다면 사기장은 이것을 몰랐을까. 사기장도 그런 것쯤은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밑굽을 넓게, 안정적으로 하면 예쁘지 않다는 것, 여자의 몸매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것이 더 중요했다. 대신 오산리 덧무늬토기보다는 굽을 좀 더 넓게 했고, 골반과 엉덩이는 더 크게, 또 허리를 잘록하게 했다. 아래 두 그릇을 견주어 보면 이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왼쪽 그릇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는 굽이 넓어 안정감이 있지만 왼쪽 그릇에 견주면 경쾌하지 않고 답답하다.

 토기는 크게 그릇 겉면에 빗살무늬를 긋거나 찍어 갖가지 무늬를 새겨 넣은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이전 신석기 전기에 썼던 덧무늬토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 그릇 민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무늬가 그릇 겉면에 약간 돋아 있어 ‘융기문(隆起文)토기’라고도 한다. 이 토기는 그릇 겉면에 진흙 띠를 덧붙이거나 그릇 겉면을 엄지와 검지로 맞집어 도드라지게 하여 무늬를 낸 그릇으로, 중·후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신석기를 대표하는 그릇이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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