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의 퍼포먼스, ‘질질 끌려가는 바이올린’(1975).
 백남준의 퍼포먼스 가운데 ‘바이올린을 위한 독주’(1962)와 ‘질질 끌려가는 바이올린’(1975)이 있다. 1962년 백남준은 독일 뒤셀도르프 캄머스필레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린 뒤 아래로 세게 내리친다. 이때 뒤셀도르프 시립관현악단 단장이 소리친다.

 “안 돼! 그만 둬!”

 이 퍼포먼스 뒤 신출내기 백남준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그로부터 12년 뒤 백남준은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바이올린을 줄에 묶어 질질 끌고 가는 퍼포먼스를 한다. 이 두 퍼포먼스는 여러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이때 백남준에게 바이올린은 ‘악기로서의 개체성’을 갖는 바이올린일까. 만약 백남준이 아니라 걸인이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에게 바이올린은 악기였을까.

 불교에서는 어떤 물체의 개체성(individuality)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개체성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그러한 성질을 가질 뿐이다. 다시 말해 뒤셀도르프는 ‘음악가’였기에 바이올린이 악기였지만 걸인이나 철부지 아기에게 바이올린은 악기로서의 바이올린이 아니거나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정한 ‘조건’은 불교의 ‘연기(緣起)’를 말한다. 불교에서 연기란 연하여(緣 말미암아) 일어난다(起)는 말이고, 연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기대어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을 뜻한다(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한겨레출판, 2016) 17∼23쪽 참조). 니스벳이 말하는 ‘연속적’이란 바로 불교의 ‘연기’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EBS의 인터뷰는 사물을 볼 때 중요한 기준인 물체(object, 개별화된 존재)와 물질(substance, 개별성이 없는 존재)을 말하고 있다. 동양인은 물질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서양인은 물체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된 원기둥 닥스와 플라스틱 원기둥을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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