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인용한 글에서, ‘물리학자들’ ‘새들’ ‘다들’ ‘사람들’ 같은 말에서 ‘들’은 문맥상 이렇게 쓰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음들’과 ‘곡들’에서 ‘들’은 서양의 수 범주에 따라 붙인 말이다. 그것은 복수접미사 ‘-들’을 붙이지 않은 ‘음의’ ‘곡이’를 ‘음들’ ‘곡들’과 견주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정재승은 이 글에서 단·복수를 철저히 구별해 ‘들’을 쓰고 있다. ‘-들’을 붙이지 않은 ‘음’과 ‘곡’은 ‘낱낱의 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소리’와 ‘한 곡’을 뜻한다. 그래서 복수접미사 ‘-들’을 붙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음들’ ‘곡들’ 또한 굳이 ‘들’을 붙이지 않아도 문맥상 그것이 복수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복수의 표시(‘끊임없이’, ‘들쑥날쑥’ 같은 말)가 문장 곳곳에 있다. 그런데도 정재승이 복수접미사 ‘-들’을 알뜰히 붙인 까닭은 그의 국어 문법 범주 안에 ‘수 범주’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초·중·고등 교과서 지문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 방송이나 신문 같은 매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쓰지 않아도 문맥상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서양의 수 범주에 따라 쓴 복수접미사 ‘-들’은 말을 복잡하게 하는 군더더기라 할 수 있다. 또 실제 한국인의 삶이나 사고방식하고도 거리가 멀다. 우리는 “야, 고구마 캐러 가자!” 이렇게 말하지 “야, 고구마들을 캐러 가자!”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들판에 나락(벼)이 누렇게 익어 가구나.” 하지 “들판에 나락(벼)들이 누렇게 익어 가구나.”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의 단·복수를 서양 문법의 ‘수 범주’에 따라 의식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우리 말글살이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동양인은 서양인과 달리 사물을 물체보다는 물질 중심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이것은 사물의 개체성(individuality)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양인과는 처음부터 다른 지점에서 이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누렇게 익어 가는 가을 들판의 벼를 보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낱낱의 개체성(벼들)을 보지만 동양인은 개체성보다는 한 덩어리(벼)로, 동일한 것(one-ness)으로 본다. 동양의 언어는 개체성보다는 그 본질에 주목하기 때문에 낱말을 성(개체의 특성에 따른 남성·여성·중성)으로 나누지 않고, ‘개체성에 따른’ 수 개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