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에서 ‘쌀’로 빚은 술은 아주 새로운 말 ‘막걸리’가 되는데, 영어는 ‘rice wine’이다. ‘쌀’의 개체성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적에 일상생활에서 수를 헤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같은(동일한) 나락’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속이 꽉 차 있고 어떤 것은 쭉정이일 수 있다. ‘단일한 것(one-ness)’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낱낱의 개체가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인은 동일한 것 속에서 낱낱의 개체성을 본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인들은 개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체 속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 속에서 개체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서양처럼 개체와 집합이 다른 것이 아니고 개체가 집합이고 집합이 개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개체는 당연히 수를 헤아리면서 셀 수 있고, 그 개체가 무리지어 있으면 ‘들’을 붙인다. 물론 이것은 ‘개체’ 중심으로 이 세상 낱말을 구분했던 서양 말의 단·복수 개념하고는 처음부터 다른 지점에 있다. 우리말에서 ‘들’은 말이 오가는 ‘현장이나 맥락’ 속에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고, ‘전체 속에서 개체’(자식들과 자식, 중생들과 중생, 아이들과 아이, 사람들과 사람)의 무리를 말할 때, 그도 꼭 필요할 때만 쓴다. 이는 옛이야기를 읽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개체란 것도 서양처럼 어떤 고정된 실체, 본성이 변하지 않는 실체로 보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늘 변하는 존재로 보았다. ‘볍씨’를 뿌려 ‘모’를 내고, 이 모가 자라 ‘벼’가 되고, 이삭이 패면 ‘나락’이 되고, 방아를 찧으면 ‘쌀’이 된다. 쌀을 솥에 안치면 ‘밥’이 되고, 술을 담그면 ‘막걸리’가 되고, 불을 때 소줏고리로 내리면 ‘소주’가 되고, 가루를 내 끓이면 ‘죽’이 되고, 찌면 ‘떡’이 된다. 하지만 영어에서 밥은 ‘boiled[cooked] rice’이고 막걸리는 ‘rice wine’이고, 떡은 ‘rice cake’이다. 이처럼 개체성(rice) 또는 본성이 끝까지 유지된다.

 서양 낱말의 개체성이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말은 쌀로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개체성은 특정한 조건에 따라 죽이 되고 떡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그것은 ‘쌀’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낱말(개체) ‘죽’과 ‘떡’이 된다. 또 ‘막걸리’와 ‘소주’처럼 그 개체의 본성이 완전히 바뀌기까지 한다.

 불교 경전 ‘중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 구절은 동양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연하여 일어나’(緣起)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주어진 조건’(緣)에 따라 그 본성이 바뀌기도(起) 한다. 찹쌀로 지은 고두밥이 물과 누룩을 만나 발효가 되고, 그것을 가마솥에 소줏고리를 얹고 불을 때면 소주가 되어 떨어진다. 찹쌀이 여러 조건을 만나 소주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는 쌀이 막걸리가 되더라도 쌀(rice)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rice wine’이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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