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같고도 다른…

 알리체 로르와커는 루카 구아다니노, 파올로 소렌티노와 함께 현재 이탈리아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또한, 알리체 로르와커는 ‘더 원더스’(2014)와 ‘행복한 라짜로’(2018)로 연거푸 상을 받았을 만큼 칸의 총애를 받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올해는 9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기생충’이 그랑프리로 호명되었을 때, 눈물을 훔쳤다는 소식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라짜로’는 그 눈물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영화다.

 로르와커 감독은 이탈리아는 물론 현재의 인류가 처해 있는 비참을 고발하기 위해 한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라짜로’가 바로 그 인물이다.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이탈리아 시골마을 인비올라타에 사는 젊은이다. 인비올라타는 후작부인(니콜레타 브라시)이 지배하는 영지로, 60여 명의 소작농이 담배농사를 지어 먹고 산다. 이들 소작농들은 소작제도가 폐지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노예처럼 살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지 못하고, 어른들은 죽도록 일하고도 빚만 남는다.

 이곳에서 라짜로는 쉼 없이 일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안아 옮기고, 트럭에 무거운 물건들을 옮겨 싣는다. 그러니까 라짜로는 마냥 착해서 동네 사람들이 시키는 온갖 잡일을 군소리 없이 해준다. 이렇게 라짜로가 마을에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이용당하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담배 밭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라짜로의 이름을 부를 때다. 이때 사람들은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를 연발하며 자신들의 몫을 떠넘긴다. 그런데도 라짜로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한다.

 이렇듯 이 마을은 지주 밑에 소작농이 있고 소작농 밑에 라짜로가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후작부인의 아들인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가 납치극 소동을 벌이면서 와해된다. 마을에 경찰이 들이 닥치고 후작부인의 비리가 발각되며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짜로는 탄크레디를 찾아 나섰다가 실족을 하고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착한 사람 냄새를 맡는 늑대의 도움으로 라짜로가 깨어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짜로’라는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에 의해 사후(死後) 4일 만에 부활했다는 ‘나사로’의 이태리식 발음이 ‘라짜로’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관객들은 라짜로가 인간이 아닌 천사일 수도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렇게 라짜로는 20년을 훌쩍 뛰어 넘어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

 그리고 도시에 도착한 라짜로는 고향을 떠난 이들이 일당벌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고, 도둑질과 사기 행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에다 후작 부인의 아들인 탄크레디 역시 은행에 빚을 졌음을 알게 된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비올라타 주민들은 하나같이 더 궁핍해진 것이다. 이에 라짜로는 나무아래서 조용히 한 줌의 눈물을 흘린다. 이런 라짜로가 탄크레디의 돈을 찾아 주겠다고 나섰다가 은행 강도로 몰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천사의 다른 이름인 ‘라짜로’가 그 어디도 아닌 은행에서, 그 누구도 아닌 민중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은, 약자들끼리의 연대 불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이쯤 되면, ‘기생충’이 최고 작품이라고 호명되자 눈물을 훔친 로르와커의 마음이 헤아려질 법도 하다.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는 각기 방법론이 다르긴 하지만 똑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봉준호가 장르영화의 문법으로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가속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발했다면, 알리체 로르와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통해 과거보다 더 비참해진 이탈리아의 현재를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감독은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를 버티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자신들의 영화방법론을 통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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