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직시하다

▲ 영화 김복동 한 장면.
공식 석상에서 자신이 종군위안부였음을 최초로 고백한 사람은 고(故)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였다.

김학순 할머니는 그 누구도 발설하기를 꺼려했던 과거의 상처를 방송국의 카메라 앞에서 증언했다. 이를 시작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당사자임을 증언하는 할머니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렇게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뼈아픈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뜻을 모아 1992년 1월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나갔고, 오는 8월14일이면 1400회째를 맞게 된다.

여기서 1400은 27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은 숫자의 합이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일본정부는 사과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발뺌하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수요집회가 처음 열릴 당시 생존해 있던 238명의 할머니는 27년이 지나는 동안 20명으로 대폭 줄었다.

‘김복동’은 이 지난한 연대기를 한 명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들 할머니들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김복동 할머니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검은 화면 속에서 김복동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지난한 인생역정을 풀어 놓았던 1992년의 음성이다. 그리고 김복동의 증언이 계속되는 검은 화면의 중간 중간에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김복동의 손이 교차편집 된다.

그러니까 이 연출은 김복동의 지우고 싶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손을 자주 씻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듯 도입부에서 녹취된 목소리를 통해 김복동의 과거를 들려주었던 영화는 곧바로 김복동이 평화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렇게 이 다큐멘터리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이 전쟁범죄국가의 이미지를 감추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했으며,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누락시켰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2012년 아베 내각이 출범하고 나서부터는 역사부정의 정도가 더 심해졌으며, 김복동이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음을 알려준다.

김복동은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망언을 서슴치 않자 직접 오사카를 찾아가 항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장정에 나선다.

이때 오사카 시청의 로비에서 김복동은 말한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고. 그리고 김복동은 위안부 문제를 배우지 못한 일본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순회강연에 나서고, 소녀상이 세워진 미국 글렌데일시를 방문해 미국언론과 인터뷰한다. 2015년에는 90세의 노령의 몸을 이끌고 유럽순회에 나서 국제사회에 일본의 파렴치했던 과거 역사를 고발하고 지지와 관심을 호소했다.

그러나 김복동의 대대적인 인권운동은 국가의 배신으로 되돌아온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합의’에서 위안부 문제 종결을 선언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들에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는데, 박근혜 정부는 할머니들과 상의 한마디 없이 굴욕적인 합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김복동의 행동을 추적한 끝에, 국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재차 안겨주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이렇듯 김복동 할머니는 국가로부터는 배신을 당했고, 일본 정부로부터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지난 1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영화는 부러 김복동의 영면을 중계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윤리다.

영화 ‘김복동’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온몸을 던져 행동하고 또 행동했던 인간 김복동에 대한 헌사다. 그리고 김복동의 27년간의 행보를 통해 위안부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직시하고 있다.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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