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택할 의지는 있을 수 있다

▲ 좋은 환경에 놓인 표범은 거의 보름 동안 먹는 걸 거부했다. 그러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 삶(먹음)을 선택했다.
 안 믿는 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왜냐면 모든 생물들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게 기본인데 자살이라는 것은 분명 이 명제에 굉장히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그것은 그들 스스로도 늘 자랑스러워하는 잘 발달한 대뇌 때문이기도 하다. 대뇌피질의 창조적이고 조직적이며 모든 신경을 통제하는 중추기능은 그 역할만큼이나 또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엄청난 정신적인 자극에 의해 한번 그 체계가 무너져 버리면 좀처럼 돌이키기가 힘들거나 영구적으로 못 쓰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비정상적인 행동(우울증, 폭력)들이 나타나거나 아노미anomie에 빠지면 자살을 선택하게도 한다. 그럼 동물들의 경우는, 사람의 예와는 달리 그 만큼 대뇌 피질이 발달하지 못하여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자살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자살의 의미가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라고 가정 할 때 동물들도 자살을 할 수 있다는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가령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고래의 자살(stranding) : 고래가 해년마다 해안가로 밀려와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작년에도 뉴질랜드 해안가에 100여 마리가 넘는 파일럿 고래가 밀려와 죽는 일이 발생했었다. 한때 고래사냥이 유행할 때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칼을 들고 달려들었겠지만 고래의 개체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대부분의 고래종이 멸종위기 상황에 처한 요즘은 물통이나 물 호스를 들고 달려간다.

이 현상을 두고 학자들은 지구온난화, 먹이의 고갈, 해양오염 심지어 어군탐지기나 군함에서 쏘는 초음파(소나)의 영향이라고까지 말한다.

또 일부 병리학자들은 이런 고래를 해부해 보고 위장병이나 전염병을 의심하기도 한다. 나 역시 해안가에서 이런 식으로 밀려온 돌고래 두 마리를 구해서 보내준 적이 있다. 그들은 갯벌로 올라와 있었지만 피부에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이었다.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다. 아무튼 비상 출동한 우리는 대학 수족관에 가져가서 연구를 해야 한다느니 그냥 보내주어야 한다느니 의견이 분분했다가 결국 119잠수부들이 들어가 깊은 물속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주었다.

돌고래처럼 영리하고 명랑한 동물들이 일부러 숨쉬기 힘든 얕은 곳에 밀려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스트렌딩과 거의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북극레밍(lemming)쥐의 집단이주 현상 : 한동안 동물들 자살이야기 나올 때 대표적으로 거론 되던 동물이었다. 일명 나그네쥐라는 레밍들은 먹이환경이 좋아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면 일부 그룹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을 시작한다.

거의 맹목적으로 선두를 따라가는 이런 동물 떼의 특성은 선두가 잘못 방향을 잡아 바다나 호수로 안내하면 그대로 빠져죽게 된다. 아마도 수명이 짧은 이 설치류들에게도 물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원초적으로 각인시키기엔 진화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리라.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온전히 자살로 봐줄 순 없다.

더 좋은 곳에 살려고 이주하다가, 모르고 아니면 전진하는 떼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빠져 죽는 거지 삶을 스스로 포기 한 행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뒤에 남겨진 소수는 살아남고 방향을 바꾸어 새 터전을 찾아간다고 한다. 집단에는 항상 선두나 우두머리가 있게 마련이다.

건기에 아프리카 사바나에선 풀과 물을 찾아가는 초식동물의 대 이동이 시작 되는데, 그 대이동 중 맨 앞에서는 우두머리 ‘누’나 얼룩말은 맨 먼저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물에 뛰어든다. 당연히 희생될 확률이 높다. 그가 희생되는 동안 다른 무리들은 유유히 강물을 건너간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우두머리는 먼저 희생을 할 줄 아는 동물로 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집단을 위한 자살을 선택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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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팬지와 원숭이의 자살 : 성숙한 침팬지의 경우 보통 I.Q 70정도의 지능을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에 빗댄 수치지 그들의 본능과 학습을 합쳐보면 개체나 무리에 따라 훨씬 더 합리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도 사람처럼 자발적인 자살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제인구달’의 침팬지 관찰 중에 어미 ‘플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은 아들 ‘플린트’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침팬지가 지능이 높아서라기보다는 어미를 잃은 새끼동물들이 통상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부모상실증후군’이라 볼 수 있다. 야생에서 독립하기 전의 새끼에게는 어미 곁에 붙어 있어야 함이 삶의 법칙이자 불문율이다.

어미의 부재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쉽게 인간과 친해질 수 있는 침팬지의 특성상 그냥 관찰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 새끼를 살려보려 했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다람쥐원숭이 사건의 경우는 자살이라고 불러도 타당할 만큼 극적이었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은 다람쥐원숭이 어미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새끼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어 버렸다.

보통 이 원숭이 같은 소형원숭이들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고 새끼도 붙잡는 손아귀 힘이 대단해서 절대 떨어지질 않는다. 그러나 새끼가 죽은 날은 이상하게도 새끼를 어미가 꼭 안고 있고 이미 새끼는 축 처진 상태였다. 그런 경우 보통은 어미를 쫓아서 새끼를 놓게 한다.

그 날도 긴 장대를 이용해서 어미에게서 새끼를 분리해 낸 후 통상적인 부검과정을 거치고 바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 어미는 일체의 먹이 섭취와 일상적인 활동을 전부 거부하더니 구석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채 끝내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어미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병명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이후 다른 원숭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어미가 새끼를 놓아둘 때까지 기다린다. 보통 이 기간은 하루면 족하다.

 죽음에 대한 옛날 미국 인디언들의 생각은 일종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느 정도 힘이 빠지고 공동체에서 더 이상 역할이 없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러 들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대로 죽음을 맞았고 다시 동물들 몸을 통해서 대지로 돌아간다는 방식이었다.

일부 고승들도 이런 식의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동물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만일 많은 동물들이 제멋대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사바나는 온통 해골무더기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은 죽음이 가까이 옴을 알고 무리를 벗어나 스스로 잡아 먹힌다. 절대 강자인 코끼리 같은 경우는 무덤 자리(집단 무덤은 아니라고 한다.)를 찾아간다고 한다.

동물원에 새로 표범이 들어온 적이 있다. 이 표범은 산장 같은 곳에서 마치 돼지처럼 사육되던 걸, 헐값으로 사오긴 했지만 우리가 구조 해온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좋은 환경에 놓인 표범은 거의 보름 동안 먹는 걸 거부했다. 그러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 삶(먹음)을 선택했다. 아나콘다의 경우도 그전 환경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1년 남짓 아무것도 먹지 않아 빼빼 말라 있었다. 그걸 살린다고 데려와 적절한 실내온도(28℃ 이상)와 넓은 수조에 넣어 줬더니 바로 먹기 시작했다.

이런 수많은 예를 통해 동물들은 죽음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정도의 의지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만일 사고라면 뭍으로 올라온 고래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혹시 그들의 자유로운 죽음으로의 선택을 우리가 괜히 끼어드는 일인 아닐까? 가을날 길거리에 버둥거리는 곤충들의 단말마를 보면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다.
최종욱 <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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