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조선 최고의 천재시인이다. 1549년 음력 11월 20일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서 1587년 음력 8월 11일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할아버지 임붕(林鵬)은 정3품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임진(林晋)은 정3품 제주목사와 종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딸은 남인의 당수이자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미수 허목(許穆)의 어머니이다. 임제는 700여 수의 시조를 비롯해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고 문집으로 ‘백호집(白湖集)’과 ‘남명소승(南溟小乘)’이 있다.

 임제는 22세에 한양으로 가던 길에 을사사화로 속리산에 은둔하고 있던 성운(成運)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고대 제왕의 정치의 기본 원리를 가르치는 유교의 경전인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라는 시조를 남기고 28세에 속리산에서 하산했다. 생원시에 이어 알성시에 합격하여 제주에 건너갔다. 아버지에게 제주의 열녀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김천덕전(金天德傳)’을 남겼다.

 김천덕은 노비인 곽연근의 아내로 재색을 겸비했다.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남편의 고깃배가 추자도에서 침몰하자 3년상을 치르고 절기마다 제사를 올렸다.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이 재혼을 강요하자 모두 거절했다. 관리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아내로 삼으려 하자 목을 매고 죽으려다가 주변 사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김천덕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미친 척하여 평생을 수절했다.

송도3절 황진이 추모하다 파직당해

 1583년 임제가 종6품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 兵馬評事)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중에 개경에 위치한 황진이의 무덤에 가서 잔을 부어 애도하며 시조를 읊어 파직됐다. 송도3절의 하나인 황진이는 임제보다 40세 정도 나이가 많은 연상의 여인이며 임제가 18세 무렵에 황진이는 사망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1579년 스승인 성운이 사망하자 당쟁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하여 정5품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의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

 종5품 관서도사(關西都事) 임제는 평양기생 한우(寒雨)에게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가 하노라’고 한우가(寒雨歌)를 전했다. 한우는 한량 임제에게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여 잘까 하노라’고 화답가(和答歌)를 남겼다. ‘찬 비 맞았다’는 ‘한우(寒雨)를 만났다’는 뜻이며 ‘얼어 자다’와 ‘녹여 자다’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말한다.

사대주의 비판 ‘곡을 하지 마라’ 유언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아들들에게 마지막 말과 함께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고향에서 39세에 사망했다.

 국도 1번을 따라 광주에서 나주를 거쳐 목포로 가는 길목에 백호 임제의 묘가 있고 조금 떨어진 영산강변에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영모정은 임제의 할아버지 임붕이 건립한 정자이며 자신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고 하였다. 아들 임복, 임진, 임몽이 3년상을 마치고 영모정으로 재건했고 손자 임제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곳이다. 400년 된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숲 옆에 ‘나주임공붕유허비’와 ‘백호임제선생기념비’ 그리고 ‘백호임제선생기념관’이 있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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