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이 사망하자 소론의 지원을 받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제20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고 노론의 지원을 받은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제21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영조는 소론으로부터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영조는 대내적으로 자신을 지지한 노론정권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을 반대한 소론을 탄압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이 연합하여 이인좌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청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반란은 관군에게 진압되고 소론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고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영조는 대외적으로 붕당의 폐단을 없애겠다며 탕평책을 추진했다.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라고 쓴 탕평비를 성균관 입구에 세웠다.

 

나주 객사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 벽서

 

 1724년 김일경은 불경죄를 이유로 영조의 심문을 받고 참형됐고 윤취상은 옥사를 당했다. 윤취상의 아들 윤지는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어 19년 만에 유배등급이 낮추어져 나주로 이배됐다. 이듬해에 유배는 풀렸지만 나주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벼슬도 할 수 없는 전리방축(田里放逐)을 당했다.

 윤지는 30년 동안 유배살이와 방축생활을 하면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소론 일파를 규합했다. 민심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괘서를 붙이고 진도를 거점으로 직접 강화도를 공격하여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영조 재위 31년째 되는 1755년 나주 객사(客舍) 망화루 기둥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벽서가 붙여졌고 ‘거병하여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동요하지 말라’고 하며 거병을 촉구했다.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는 괘서의 관련자인 윤지를 비롯해 윤지의 아들 윤광철, 나주목사 이하징 등 60여 명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영조가 친국(親鞫)을 하여 윤지와 이하징은 처형됐고 가족까지 연좌되어 극형을 받았다. 윤취상·김일경·조태구 등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형벌이 추가됐고 자식들은 노비가 되었다. 박찬신·김윤·조동정 등은 사형되었고 이광사·윤득구 등은 유배되었다.

 

영조 정치적 이념 탕평책도 물거품

 

 영조는 51년 7개월 동안 재위했고 6명의 부인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다. 하지만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는 10살에 요절했다. 영조가 42살에 얻은 아들을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했고 15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나주괘서사건으로 영조의 정치적 이념이던 탕평책도 물거품이 되었고 소론은 권력에서 사라지고 노론이 모든 권력을 잡게 되었다. 또한 나주괘서사건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소론을 옹호하여 임금이자 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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