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1935년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가 함께 개최한 ‘전국 6대 도시의 향토찬가’ 공모전에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이 1등에 당선됐다.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이 ‘목포의 사랑’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이 작곡하여 19세 소녀가수 이난영이 노래했다. ‘목포의 눈물’은 남도 판소리 가락과 흐느끼는 창법 그리고 독특한 비음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삼백년 원한(三百年 怨恨) 품은

 문일석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본명은 윤재희이며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무명시인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 표현했다. 일제의 노래 금지를 피하기 위해 ‘삼백년 원한(三百年 怨恨) 품은’을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바꾸어 불렀다. 문일석은 일제 징용을 피해 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어 1944년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손목인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본명은 손득렬이며 일본 도쿄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작곡가이다.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을 작곡했다. 손목인은 ‘참사랑’, ‘봄날의 화신’ 등 친일가요를 작곡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1999년 8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난영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본명은 이옥례이며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어린 시절 무명가수로 활동하다가 1935년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여 조선 최고의 ‘가왕(歌王)’으로 등극했다. 1942년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라는 가사의 ‘목포는 항구다’가 다시 히트했다.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손목인 작곡

 이난영이 결혼했던 작곡가 김해송은 한국전쟁으로 납북됐다. 이난영이 사랑했던 남인수마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난영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4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의 원한과 슬픔을 달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1980년 5·18로 희생당한 전라도 사람들의 애국가가 되었고,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가 되었다. 지금은 한국 가요사에서 최고의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목포는 1897년 개항한 우리나라 최서남에에 위치한 도시이며 해방 이전까지 부산, 인천 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3대 항구였다. 일제는 목포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 면화, 목재, 수산물 등을 일본으로 약탈했다.



전라도의 애국가로 불려

 3마리의 학이 내려앉아 섬이 되었다는 삼학도는 지금은 내륙과 이어져 육지가 되었다.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유달산 정상에서 목포와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량미를 많이 쌓아둔 것처럼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9년 이난영을 추모하기 위해 국내 대중가요사상 최초로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건립했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기념하여 국내 대중가요사상 최초로 ‘난영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난영의 생가 터에는 흉상을 세운 소공원이 조성됐다. 하지만 지금도 목포는 설움이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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