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丁若鏞)은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3품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며 어머니는 윤선도의 증손녀이자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황사영의 장인인 정약현의 이복동생이며,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과 신유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정약종의 동복동생이다. 누이는 이승훈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4대가 순교했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학문이 뛰어나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복형 정약현의 처남이자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저술한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했다. 다시 대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에서 공부하며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배다리를 만들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강진 유배

 정약용은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유배됐다가 11일 만에 해배됐다. 다시 관직에 복직하여 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을 순찰했고 정3품 동부승지로 승진했다.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됐다. 정3품 형조참의로 승진하였으나 다시 탄핵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했다.

 정약용은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며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에 반대했다.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조모인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 승격돼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남인과 노론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오가작통법에 따라 가혹하게 처벌하는 신유박해를 자행했다.

 신유박해로 주문모, 이승훈, 황사영, 정약종 등 300여 명이 처형됐고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됐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의 주막집 골방으로 이배됐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하라’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짓고 4년간 기거했다.
 
 ▲ 1표 2서 등 500여 권 탄생

 정약용은 4년 동안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외가친척 윤규로가 마련해준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에서 해배가 될 때까지 10년 동안 머물면서 강진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해남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교우했다. 녹색비가 내린다는 외갓집인 녹우당의 서책을 읽으면서 국가경영을 다룬 ‘경세유표’, 수령의 지침을 다룬 ‘목민심서’, 법률과 재판을 다룬 ‘흠흠신서’ 등 1표 2서를 비롯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은 18년 만에 해배되어 정3춤 승정원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고향 두물머리로 돌아가서 은둔했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에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라는 회혼시(回婚詩)를 남기고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약용이 떠나간 다산초당은 허물어지고 잡초만 우거졌다. 후손들이 빈터에 초당(草堂)을 와당(瓦堂)으로 복원했다. 유홍준은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아 다산초당이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하루 빨리 기와집이 초가집으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離反)이다’고 하던 정약용의 외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서일환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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