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국의 고분군.

 카이로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은 크로노스다. 무의미하게 보낼 시간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환원할 때 카이로스라는 말이 쓰인다고 했다.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감하게 소진하고 있을지는 경험을 통해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이 있어 다시 유의미한 시간이 창조되고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테크 시대가 된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사건건 내 삶에 관여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따질 이유도 없다. 시간과 전쟁을 치르듯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고 싶어서 지원한 일들이 어깨를 짓누르고 그곳으로부터의 요구는 쉼 없이 이어진다. 하고 싶었단 초발심은 어느 사이 사라지고 일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다 재껴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지만 도피처도 마땅치 않고 설령 피했더라도 나를 따라 다니는 전화기가 산통을 다 깨 버린다. 일은 파생상품처럼 더 많은 일을 만들고 편의점의 1+1처럼 또 다른 일이 따라 붙는 여기는 아수라와 같은 세상이다. 돈을 보고 쫓아간 일 보다는 대의와 명분과 책임이라는 공명에 따라 서 보았지만 주변의 시선은 늘 곱지 않다. 독식이라는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잘 나간다는 것이 두 번째로 따라오며, 세 번째는 의심이 따라온다. 일을 관계로 시작하고 관계로 풀어간다는 나에 대한 세간의 지적이다. 모두 경계하며 조심하는 일임에도 지쳐간다.

 

문화예술지원사업 심사차 부산으로

 

 광주시의 다양한 산하기관에 출입을 안 한지 오래되었다. 어느 사이 자격을 상실해 버린 현실의 내 위치다. 시로부터의 참여 권유와 요구는 많은데 광주시의 눈 보다 더 까다로운 눈을 가진 시 산하기관은 현 정부와 같이 블랙리스트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참담한 그들의 현실을 정책 결정과정에서 혹은 어느 술자리에서 듣는다. 자기 땅에서 유폐를 강행하는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웃기지만 그게 광주의 현실이다. 대안적 비판과 새로운 흐름을 경계하는 그들의 시간은 크로노스에 해당한다. 그들만 모르고 그 밖의 세계에서는 다들 아는 일이다.

 1월부터 3월까지 문화부분에서는 문화예술지원과 관련한 다양한 심사가 이뤄진다. 이를테면 한해의 파종기이다. 대구에서는 심사하는 분들을 참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심사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부산에서는 공공기관에 소속되거나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예술인들의 지원 사업 참여를 배제하고 있었다. 창조적 생산 활동에 전력을 다하는 전업예술가를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보여진다. 다양한 지역의 지역문화를 향한 고심을 보고 다니다 2주전 부산문화재단으로부터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청년 문화기획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심사였다. 부산의 청년문화생태계의 단면을 보는 자리라 흔쾌히 달려갔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하니 광주에서 다섯 시에 출발했다. 길은 순탄하여 일찌감치 부산에 들어섰다.

 모임 장소에 가기 이른 시간이니 해찰은 필수, 만만한 해운대로 갔다. 모래사장은 텅 비어 있고 파도가 들어오는 곳에 묵언 수행하는 납자처럼 갈매기 한 마리가 불립문자를 쓰고 있다. 갈매기 하면 떠오르는 조나단은 더 높고 더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를 연마했지만 해운대의 갈매기는 이미 초탈해서 돈오의 삼매경에 빠져든 듯 했다. 그 앞에 멀거니 앉아서 힘찬 대양의 기운을 호흡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니 마치 맥주의 거품이 몰려오는 듯 했다. 술꾼의 눈에는 그러했지만 썩지 않기 위해 제 몸을 부딪히는 바다에게는 미안했다. 그런 마음이 부끄러워 다시 길을 나섰다. 출근길의 아침은 제법 붐벼서 겨우 시간을 맞춰 테이블에 앉았다. 부산에는 청년문화를 지원하는 팀이 따로 있다는 것도 거기서 보았다. 두어 시간의 일정이 끝나고 점심을 마치고 두 번째 목적지로 떠났다.

 

 훤칠하면서 편안한 탑리 5층 석탑

 

 두 번째는 울주군이었다. 울주에는 내가 아껴 쓰는 낚싯대를 파는 인터넷 중개상이 있다. 지난 초겨울에 산 낚싯대의 중간이 부러져 바꿔야 하고, 인터넷상에 떠 있는 상품 정보로는 구매하기가 조바심스러워 직접 현품을 보고 구입하고 싶어서였다. 부산으로부터 1시간여 만에 소읍의 낚시점에 들렀다. 불과 15평도 안 되는 공간에 다양한 낚시 용품이 전국을 향해 배달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7시에 경북 의성군에서 대인예술시장의 사례 강의가 있으니 시간의 여유가 있을 듯 했지만 낚싯대 교체하고 몇 개 눈에 띈 낚싯대를 이리 저리 만져보고 던져보고 휘어 보다 보니 쏜살같이 시간이 간다.

 울주에서 의성까지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하면서 서둘러 보지만 견물생심의 마음을 저어하지 못하다 결국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의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비어 있어서 좋았다. 그 유명한 의성마늘이 든 요리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의성군 내에서 주어진 시간 한 시간이니 가는 길에 보이는 유적은 보고 가야지 하는 욕심을 냈다. 저 유명한 봉정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고운사를 갈까 했지만 네비게이션이 포기하라고 40분 정도의 소요시간을 일러준다. 그렇다면 이제는 길가의 밤색 문화재 안내판을 보면 되는 것이다. 유심히 보니 눈에 딱 들어온다. 탑리 5층 석탑이다. 탑이 있는 곳에 마을이 들어섰으니 탑리렸다. 학교의 교정 한켠을 차지하며 마을을 내려 보고 있는 탑의 위용이 훤칠하면서도 편안하다. 인간의 소망을 부처님께 전달하려는 신라인의 마음이 여기 집중된 듯 탑 아래 바위에는 성혈들이 파진 모습도 보인다. 그 안에 쌀을 넣었거나 촛불을 밝혔으리라. 마을에 있는 교회의 첨탑과 늙은 탑의 염원이 개별적으로 보이지 않고 조화롭게 생각된다. 자연에 감응하는 토착신앙속에 스며든 불교, 새로운 문물의 이입과 더불어 마을 구석구석으로 들어온 교회의 근원은 결코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살펴본 탑의 모습은 부여의 정림사지나 영암의 월남사지의 탑과 닮아 있었다. 오랜 세월 풍찬노숙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인간의 염원을 전하는 탑을 한 바퀴 돌며 한편으로는 이 근동의 오래된 벽돌탑과도 한 뿌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문익점 면작기념비·고대 왕릉

 

 매화향이 흩날리는 교정을 뒤로하고 다시 의성읍을 향해 간다. 그 길가에는 문익점의 면작기념비가 있다. 원나라로부터 귀국하는 길, 백성들의 신산하고 고단한 삶에 솜이불 한 채라도 넣어주려는 공의 충심은 붓대롱에 목화씨 다섯 개가 상징한다. 하지만 장인과 함께 심었던 산청 시배지의 씨앗은 쉽사리 부응하지 않고 네 개가 죽고 하나가 살아났으니 그 후손을 의령현감을 하던 손자 문승로가 애초에 씨앗을 가져온 환경과 부응한다고 하여 여기까지 와서 심어진 것이다. 엄연히 보면 면화를 시작한 곳과 본격적인 재배를 한 곳이 다르니 이곳은 면작지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었다. 박선홍 선생님의 ‘광주 1백년’에서 만난 함양에 있는 누에고치를 위한 잠령비가 떠오른다. 하여튼 문익점에 의해 한반도로 유입된 목화는 대표적인 삼백(쌀, 명주, 면화)이 된 것이고, 일제강점기 일제는 그런 목면을 수탈하기 위해 산업을 권장하는 수단으로 이런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면적지의 아래로는 고대의 왕릉이 보인다. 삼한의 왕국이 여기 존재했었다. 산야가 가파른 쪽과 뜨락을 가진 그 접경에 조문국이라는 왕국이 건설되었고 권력자는 그 산야에 커다란 산과 같은 봉분에 묻혔다. 그 시대의 사후관은 죽음 이후에도 생애와 같은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존재한다고 신봉했기에 주군을 모시던 신하와 궁녀들이 함께 묻혀야 하고 그가 사용했던 생활용품과 상징적 도구들이 무덤 안에 안치되었다. 하니 오래된 무덤을 열면 그 내부에 동시대의 최첨단 문명이 고스란히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그 시대의 고배나 왕관이나 무기류들이 들어있다. 이 일대에만 해도 200여기의 고분이 있다 하니 당대의 문화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나주의 반남 고분군이나 경주의 대왕릉과 같은 풍경이 여기 저기 산이 아니며 산처럼 존재하는 조문국의 왕릉과 박물관을 휘돌아 나와 의성의 읍내로 간다. 소읍이지만 20여명의 젊은이들이 대인시장의 사례를 듣기 위해 귀를 열고 있다. 간단히 들려본 유적지가 말문을 트이게 하고, 우리들의 대화는 야심한 시간까지 이어진다.

 일방적인 자랑이 아니라 유발된 실수와 그것을 만회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까지 이야기 하며 서로의 궁금함에 대해 묻고 답하길 두어 시간. 의성의 밤은 칠흑 같았고, 내 자동차는 다시 의성 읍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광주로 성큼 넘어왔다. 카이로스. 길 위에서 자칫 숨질 뻔한 시간을 불러낸 그날을 이 원고지 위해 다시 호명해 보았다. 다시 갈 때는 반드시 고운사에 들리고, 풍혈과 빙혈도 만나 보고 싶어진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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