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락에 인공 산처럼 떠 있는 무덤

 우리나라의 국토를 말할 때 산지가 70% 정도에 달한다고 흔히들 이야기 했다. 지금은 깎고 매립하면서 비율이야 달라졌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산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이다. 한데 나주는 다르다. 영산강의 드넓은 평야를 가진 나주는 근 50%가 평야지대이다. 호남이 흉년이면 전 강토가 굶어죽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특히나 나주가 흉년이면 8도가 다 굶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나주의 다시면은 쌀로 유명하다. 내가 살던 시골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는데 감남쟁이 쌀 먹고 자란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이었다. 그 말처럼 “다시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이 있다. 즉, 쌀의 맛과 질이 빼어났다는 반증이다. 앞서 얘기한 어팔진미와 소팔진미 앞에는 반드시 이 쌀의 질과 맛이 끼어 있어야 한다. 요즘에도 맛집에 가 보면 가장 중심은 밥맛에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런 다시의 뜨락에 인공의 산처럼 떠 있는 무덤이 바로 복암리 고분군이다. 무덤의 아파트라고 불리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다. 원래는 7기가 있었다고 했으나 일제 강점기 경지를 확장하면서 3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4기인데도 평야지대에 돌올하게 솟아 있는 것이 이채로운 모습이다. 그런 무덤을 파고 닫기를 여러 번 하면서 무덤의 형태와 껴묻거리가 갖는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특히 3호분에서 발굴한 금동신발의 당대 조형미와 세력권 등에 대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과 같다. 해서 나주시는 2016년 97억 원을 들여 전시관을 열게 된 것이다. 전시관의 내부는 3호분 고분의 실물을 그대로 옮기어 놓은 형태였다. 지하로 인입하지 않고 지상에 노출되어 내부를 타원형으로 돌면서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나 눈길을 끄는 것은 다양한 묘제의 양식이었다.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것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갔던 묘지의 양식이 다양하게 섞여 있으니 이것이 횡혈식 석실묘인지 옹관묘인지 석관묘인지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는 동물 모형을 두어서 황토흙속의 무덤만 바라보는 우울함을 전혀 색다른 것을 배치함으로서 웃음짓게하는 위트도 함께 보였다.

 

 지난해 97억 원 들여 전시관 오픈

 

 마한의 시대인 3세기에 시작하여 7세기의 백제식 토묘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묘지이다 보니 그 시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부장품으로 함께 출토되며 역사를 일러주고 있었다.

 더불어 일본에서도 발굴된 칼 종류가 있어 당대의 교류사도 알 수 있게 하며 한편으로는 일본과 논쟁의 여지도 발생하는 물증이기도 하다. 은제관식이나 대형옹관 등이 배치된 전시관을 보고 로비로 나오니 나주지역 사람들의 삶을 담은 70년대의 사진이 정겹게 배치돼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동어인 것, 저 삼한시대의 삶도, 새마을 운동의 시대를 살던 삶도, 그리고 최첨단 IT 시대를 사는 삶도 사는 것은 어차피 전쟁 같은 것 아닌가 싶어지며, 한편으로는 잘 먹고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인다.

 나주와 영암의 근처에는 반남고분군이 있고, 함평에도, 영암에도, 광주에도 마한과 삼국시대의 시대를 담은 고분들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을 정립하며 국립나주박물관까지 생겼으니 이제 틈이 나면 반남으로 달려가고픈 생각이 일었다. 기실 경주의 고분은 비교적 소상히 알면서도 정작 내 고향의 고분은 잘 알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면서….

 이제 다시를 나와 나주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는 여느 도시와 같이 소란스럽게 보였다. 약간의 어수선함은 지금 바야흐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재생과의 연관성이 아닌가 싶었다. 4년 전 서울의 질병관리본부에 갔을 때 그곳에 있던 비석이 없어진 자리를 본 적이 있다. 무엇이 있었고 왜 사라졌냐고 물으니 질병 예방을 위해 수많은 쥐들이 희생하는 곳이니 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석이 있고, 그 비석을 가지고 질병관리본부가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박선홍 선생님의 ‘광주 1백년’에 보면 산청군의 군청사 앞에 누에고치를 위로하는 비석이 사진으로 등장한다. 잠사가 성행했던 지역에서는 그 작은 미물, 하지만 인간의 밥줄을 이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를 이런 식으로 기념하였던 것이었다. 나주도 그런 잠사산업이 발달했던 곳이었다. 성행했던 산업이 폐쇄되었지만 잠사공장과 숙사가 그대로 잔존하고 있으니 이를 매개로 지역 재생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이사 간 교회를 매입하여 나비센터를 개소하고 그곳이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이 되어 지역민의 근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공공미술이 휑한 공간의 썰렁함을 달래고, 공장과 숙소는 리모델링중에 있었다. 나주를 상징하는 빛날 라(羅)와 빛나는 옷과 나비의 수려한 날개가 겹쳐진다.

 나비센터를 중심으로 천년고도 나주의 힘이 재집결하여 지역의 강한 힘을 발휘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진다.

 

 천년고도 나주의 힘 재결집 기대

 

 금성관 앞에는 사방을 둘러봐도 곰탕집이거나 곰탕집을 찾는 이들뿐이다. 곰탕집의 바로 전면부에 있는 금성관이 지닌 역사와 의미는 밥집과 무감하였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존 방식에는 먹는 것과 싸는 것 말고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는가.

 다만 지역의 소중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무언가의 장치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 나라의 문화재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해야 할 뿐, 내부를 활용하거나 변형하는 것에는 너무나 인색하기 때문이다.

 남도의 심장 나주, 생명의 땅 나주, 호남 최대의 곡창 나주, 원색의 고장 나주의 중심에서 잠시 나주 사람에 얽힌 에피소드를 생각해 본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조의 아내 순원왕후의 동생 김좌근이 정치를 주무를 때 그의 첩이 나주 여인 나합이었다고 한다. 높은 벼슬을 한 이를 합하라고 하는데 나주의 합하를 줄인 말이 나합이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이 나합을 놀려주려고 “너는 어찌 천민 출신의 기녀가 감히 합하라고 존칭을 붙여 부르게 했느냐”라고 따지자 “세상 사람들이 소첩을 두고 나주 출신의 기녀라고 우롱하며 조개 합자를 붙여 불렀을 따름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고 한다. 한데 이 여인이 나주에 큰 가뭄이 들어 굶어 죽는 이들이 생기자 김좌근을 움직여 몇 천 섬의 곡식을 나주로 보내 살려 냈다고 한다. 나합의 덕택으로 살아난 이 지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을 하거나 말거나 김좌근의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편에서). 김좌근의 공덕비….

 한번 찾아보고 싶었지만 어둠이 내려오고 나주의 하루는 이렇게 마감 지었다.

 다시 나주를 찾으면 고분에 대한 공부와 나주 사람들을 더 상세히 만나 보아야겠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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