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지문화관에서 바라본 산자락.
 모두들 도시로 떠나간 시골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다. 농촌은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에 이르렀고, 들판에서 젊은이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늘상 괄시 받아온 농사일이었으니 그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에서 이곳에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농촌에 남아있는 젊은이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원주시의 매지리 회촌도 그런 대한민국 땅의 현주소와 동어반복이다. 원래 전나무가 많아서 전어치라 불리던 마을이 전나무 회(檜)자를 가져다 회촌이 되었다.

▲원주를 기억하는 네 가지 방식

 그런 회촌이 있는 원주를 기억하는 내 방식은 크게 네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영성의 고장으로서 원주다. 높은 치악산 자락에 둘러쳐져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좁쌀 한 알의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예의를 다지고 다졌던 곳이 바로 원주다. 그런 탓인지 군사독재시절 원주는 독재의 탄압을 받아 몸을 은신하는 이들의 피난처 역할도 수행했다. 대표적인 분이 바로 김지하 선생이고 이를 안아준 분이 가톨릭의 지학순 주교님이시다.

 두 번째는 이와 연계하여 생명을 모시는 한 살림 운동이 시작된 곳, 협동조합 운동의 발원지로서 원주가 존재한다. 지금이야 아이쿱과 같은 대응 조합이 생기기도 했지만 지역 내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밥상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서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이 보여주었던 힘은 여전하여 요즘 정부가 대대적으로 사회적 기업을 권면하는 가운데 으뜸가는 사례로 꼽히는 곳이 원주인 것이다.

 세 번째는 김금원이라는 여인이다. 조선후기의 이 처자는 열네 살의 나이에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난 것에 한계를 느끼고 부모를 졸라서 남장을 하고 길 위에 선다. 당대의 여성이 유교적 억압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그 나이에 알게 된 그녀는 이제 이렇게 나이를 먹어 비녀를 꼽으면 내 몸도 마음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그 전에 소녀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빌고 빌어 뜻을 이룬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제천의 의림지와 단양팔경이었다. 수많은 선현들이 그 절경에 빠져들었던 곳에서 자신도 공감하다 내친걸음에 금강산 여행과 관동팔경의 유람까지 강행했다. 14살의 그녀가 이야기 했던 것은 이러했다.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야만국이 아닌 문명국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나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과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고 한미한 집안에 태어난 것은 불행이라고.”

 그녀의 기행은 34세에 탈고한 ‘호동서락기’라는 서책으로 전해온다.

 ▲김금원이라는 조선 여인의 고장인 원주

마침 지방분권의 시대를 맞아 원주 혁신도시에 한국관광공사가 이전해 있어 몇 개월 전 남북관광 관련 담당자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북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관광길을 다시 뚫어야 하는 게 업무 중의 하나라는 것을 듣고 나는 과감히 제안을 했다. “김금원 루트를 만들고 김금원 탐험단을 만드세요”라고. 14살의 대한민국 아이들이 금원이 걸었던 삼팔선 없는 길을 이념에 물들지 않고, 사념 없이 걸어서 단절된 남북의 관계를 이어주는 그 행렬을 원주 아이들이 하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아직 답은 없다. 난 늘 그렇듯이 이리 실없는 사람인가 보다.

  각설하고 네 번째 원주는 대하소설의 지평을 넓혔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계셨고, 토지문화관을 만들어 후진들이 글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었던 곳이다. 박경리 선생과 관련한 공간은 이곳 말고도 원주 시내에 한 곳이 더 있고, 선생이 태어나신 경남의 통영에도 자취가 남아있으며, 소설 ‘토지’의 핵심 공간이었던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소설속 최참판댁이 존재하고 있다. 구한말에서 조국 광복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씨줄 날줄을 한 집안의 서희라는 여성을 통해 조영해낸 ‘토지’는 그야말로 전 국민의 열광을 받았던 소설이자 드라마로서 존재했고, 아직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유지를 받은 문화관은 마을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고, 매지리 안쪽으로는 물줄기와 산을 따라 자연스럽게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다.

 ▲원주의 지역문화기획인력 양성

 문화관에서 있는 행사는 원주지역의 지역문화기획인력을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 인력의 대응설계를 위한 인력 양성, 특히나 젊은 인력 양성에 열을 올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물론 이전에도 조금씩 있었지만 그때는 지역의 자발성에 근거해서였다. 예를 들면 강원도 춘천에서 있었던 무한청춘 페스티벌과 같은 경우도 바로 지역 젊은 기획자 양성의 일환으로 청년이 주체가 되어 지역 축제를 만들어 가는 사례에 해당된다. 부산 지역도 젊은 기획자들이 고루 분포하지만 이들을 따로 엮는 작업은 하지 않았고 다만 사상인디스테이션과 같은 독립되고 실험적인 젊은이들의 약진을 응원하고 조력하는 문화재단을 두고 있었다. 광주는 3년 전부터 광주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청년문화기획자를 양성하는 유망주 프로젝트를 필자가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개별적인 것에 더해 중앙단위의 생활문화진흥원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기획인력 양성 지원 사업을 벌인 결과 원주문화재단이 이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 함께한 인력들이 어떤 여건이 되더라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장소 특정형 현장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원주 토지문화관에 간 이유였다.

 ▲매지농악의 중심, 회촌

 3일간의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 팀이 해야 할 일은 마을의 내력을 파악하고 이 속에서 마을의 문화관련 키워드를 찾아내고 실행파일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전에 마을 청년회 분들이 오셔서 마을 현황에 대한 말씀과 안내를 해 주셨다. 70대를 넘으신 분, 그 중에 20여 분이 여성이시고 남자 분은 4분밖에 안 계신다는 것과 젊은 남성은 10여 명이 되는데 대부분 원주 시내에서 출퇴근하는 분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많으셔서 농사일은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라 젊은 분들이 대신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농사는 크게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특용작물 중심의 농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영서지방을 대표하는 ‘매지 농악’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서에서는 독특하게 이 지역만 있어서 해마다 농악을 배우고자 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는 말씀도 하신다. 덕분에 매지농악은 마을 주민이 줄어들어도 명맥을 이어주는 이웃의 벗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농악이 울리면 동네를 가득 채우던 동네 사람들이 사라진 것에 대한 허전함은 한숨으로 이어진다.

 이런 말씀 끝에 우리는 한데 어울려 마을로 들어갔다. 추적거리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 동네의 가장 신비한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향했다. 성황당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마을의 동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성황당은 독립된 건물에 모셔져 있고, 양 옆으로는 신비한 나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엄나무인데 나무 자체가 가시를 가지고 있어 신성함을 상징하며 잡귀를 물리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다. 커다랗게 성장한 나무는 세 그루였는데 그중 한그루는 태풍으로 쓰러지고 말았지만 그 위엄은 그대로였으며 삼신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엄나무의 맞은편에는 피나무가 일곱 가지를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일곱 개의 영험한 가지는 칠성목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이 또한 서낭신의 영험함을 옹위해 주고 있었다. 생명을 점지해 주는 삼신과 생명을 관장해주는 칠성신이 양 옆에 서 있는 가운데 서낭당은 자리한다. 아니 그 보다 백운산 자락의 긴 골짜기에 한 자락 집터처럼 솟아오르는 능선 안부에 자리한다. 나무만 치우면 바로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하니 마을 수호신의 자리로는 적격이다. 20여 년 전 오대산의 적멸보궁에서 보았던 터가 지닌 당당함이 멀리 보이는 산맥과 동격이거나 한수 위처럼 보였던 풍수도 모르는 내 안목에 이곳이야 말로 명당 터가 틀림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1936년 동네사람의 꿈에 산신령이 현신하여 내가 있는 곳을 빨리 옮겨 달라고 했다한다. 하여 어디로 모시냐고 했더니 방울소리를 따라가라고 해서 잡은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수일후 마을에 홍수가 나서 본디 서낭당이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쓸려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니 이 영험함에 동네 분들이 손수 사당을 집고 흔치 않게 남녀 산신령을 모시고 있으며 매해 단옷날이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로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50여 가구에 달했는데 매해 가구 수가 줄고 있으니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있는 공동체 사회였다.

 마을로 내려와 어르신들에게 말을 걸어도 대꾸 보다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신다.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한 듯 하셔서 조심스레 다음날 또 찾아보니 조금씩 마음을 여신다. 이곳저곳 각종 지원 사업이 남긴 폐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번 기획자 양성사업으로 이 마을을 또 쑤셔 댈 것을 걱정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외국인 작가 몇 명이 투숙하며 토지를 쓰셨던 박경리 작가의 필력을 본 받아 가는 힘이 있듯이 매지농악전수관에서는 낮은 소리의 장구가 울리고, 경로당에는 어르신들이 지난 세월을 복기하며 삶의 신산함에 쉼을 주고 계시고, 이것을 모두 잡아낸 삼십 여명의 예비 기획자들은 주민이 우선인 하드웨어와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연신 머리를 맞댄다. 그 현장에 투입되어 멘토를 하고 하는 나는 이 난감한 농촌현실을 알면서도 밥을 먹고 있는 게 부끄럽게만 느껴진다. 관광이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 느끼는 정부는 이 참담함을 정말 아는 것일까 싶어지는 회촌의 3일이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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