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휴가, 청풍명월 제천으로<2>

▲ 단양 적성.
 모두들 단단히 구명조끼 입는다. 그리고 차에 올라 산줄기를 넘어 출발지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를 태운 낡은 차량은 수천 번은 이곳을 지났는지 도대체 길 위에서 속도를 줄이는 법이 없다. 래프팅 회사의 관행이라 치더라도 안전에 대해 너무나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며, 이런 스포츠형 관광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차량의 안전과 운전원의 규범준수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싶어졌다. 모두들 안전벨트를 매고, 차량의 손잡이와 그마저 없으면 의탁할 곳을 찾아 의지해야 했다. 20여분의 긴장 속에 시작 지점에 도달했다.

 준비된 보트에 오르기 전에 준비 운동을 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물이지만 저 물이 가장 위험한 것이기도 하기에 가족들은 모두 강사의 지시에 잘 따랐다. 제일 막내가 여섯 살이지만 총기 있고 발랄해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 곁에 아빠가 있으니 더욱 든든했다. 두 대로 나뉘어 탄 보트는 순항을 시작했다. 주변으로 보이는 풍광을 찍기 위해 방수패드도 없이 핸드폰을 가져오는 무모함을 나와 아들이 공모했다. 일견 아들내미는 자기 핸드폰은 방수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기도해서 나만 조심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소지한 것이기도 했다. 둘다 그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고, 우리의 카메라는 바삐 움직였다.
 
▲래프팅, 위대한 자연에 스며들다
 
 덕분에 여울이 나오는 곳에서 강사의 지시를 받지 않아 큰 돌 턱에 걸리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여울을 지나며 우리는 한차례 물싸움을 했다. 노를 이용해서 물을 상대에게 뿌리는 것인데, 준비가 안 된 우리 보트는 일방적으로 물세례를 받아야 했다. 특히나 상대편의 강사는 노를 이용해 물을 뿌리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 보였다. 그렇게 재미나게 운항을 하다 어라연 이라고 하는 곳(물고기가 지천이어서 그 비닐이 반짝이는 곳이라 이름을 물고기 ‘어’에 빛날 ‘라’와 연못 ‘연’자를 써서 어라연)에서는 잠시 정박을 했다. 수영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해 준 것이다. 제일 먼저 물에 몸을 던진 것은 아들 호연이였다. 중학교 2학년, 어리숙한 것 마냥 하던 이 친구는 어제는 번지점프를 끝내 해내더니 오늘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천방지축이었다.

 사촌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다니는데 그 형과 죽이 맞아 틈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몸싸움을 벌이고, 뭔가를 도란거리며 히죽거리는 모습을 내내 보아왔다. 그럴만한 나이이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었지만 뭐랄까 잠재된 끼 같은 것이 지금 표출되는 것이 나로선 행복한 발견의 시간이 되었다. 엄마는 나와 달리 자꾸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제어하거나 꾸지람을 하지는 않는 것도 고마웠다. 여튼 물속에 뛰어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신이 나 있었다. 흐르는 강물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놀이의 수단으로 쓰이는 진귀한 체험을 한 것이다.

 다시 보트에 올라 서서히 도착지점을 향해 간다. 여울을 건너며 가족 공동체의 단합된 힘을 경험하고, 물싸움을 하며 재치와 순발력을 배우고, 헤엄을 치며 스스로의 수영기술이나 체력도 파악해 보는 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위대한 자연에 스며들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우리를 즐겁고 보람되게 해준 동강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아우라지로 이름난 정선의 조양강이 함께 만나서 이뤄진 남한강의 상류지점으로 65㎞를 흘러 서강과 만나 남한강 본류대에 진입한다. 정선 아리랑으로 유명한 아우라지는 서너 번을 찾았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뱃사공이 들려주는 아리랑을 들었던 시대와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주던 시대까지 경험하고 그 이후로는 찾지 못했다.
어라연에서의 물놀이.

▲90년대 영월댐 반대 투쟁 기억 새록
 
 그런 심산유곡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서 강물에 실어 나르는 시대가 있었다. 뗏목으로 엮어 강을 따라 서울에 이르는 긴 여정은 그야말로 험로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이 항로가 순항을 하면 목돈을 벌 수 있었다. 일가친척과 동리를 먹여 살리기 위한 뗏꾼들의 떼돈을 향한 행렬에서 떼돈 벌었다는 말이 탄생한 곳도 바로 이 강이다.

 90년대 후반 홍수로 인해 피해가 크자 정부가 나서서 영월댐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곳은 석회암 지대로 물경 250개나 되는 동굴이 있고, 지반이 침하되는 상황이 언제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다. 나도 1999년 40여명의 광주전남환경연합 회원들과 응원 방문을 했었다. 그때 이 경관에 편입되었을 때 길라잡이를 해 주신분이 지리산의 반달곰 복원에 헌신한 한상훈 박사와 산양 보호에 여념이 없으신 박그림 선생님과 백룡동굴을 발견한 정무룡 선생이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종착지에 도착하니 우리가 노를 젓거나 강물의 힘에 밀려 내려온 지 2시간 40분이 지났다. 홀로 기다리시는 어머니가 그제야 걱정이 되었다. 그늘에 계시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우리만 기다리셨을 터이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어머니와 만나고 숙박 공간을 찾는다. 춘천에 있는 후배에게 알아봐 주라고 했지만 어려울 것을 짐작했는데 후배는 선뜻 래프팅 업체와 인접 시설 간에 네트워킹이 잘 되니 그리로 부탁해 보란다. 그렇게 최고 성수기의 2박은 동강 근처의 펜션으로 결정이 났다.
레프팅.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숙소를 정하고 식사를 하러 가족들은 영월 읍내로 향했다. 저녁은 어머니가 사시겠다고 한다. 20만원 내로 한정했으나 모두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다. 다들 강에서 힘을 소진한 탓일까 싶어 흔쾌히 결정했다. 다시 식당을 선정하는 것은 대학생인 조카들의 몫이다. 이곳저곳 검색을 하더니 고깃집 한곳을 지정한다.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맘때의 영월은 대체로 그러할 것이다. 수려한 풍광과 다양한 놀거리, 볼거리 들이 있는 곳이고 심지어 박물관의 고장 영월을 표방하고 있으니 감수해야 할 일이지 싶다.
 
▲역사기행, 아이들과의 동상이몽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의정부의 여동생 가족은 다음날 출근이라서 떠나고 남은 세가족은 숙소로 돌아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 강가의 물안개를 보기 위해 일어났지만 너무 무더운 날씨 탓인지 안개는 피어오르지 못했다. 대신에 노트북을 꺼내왔다. 밀린 원고를 써야 했다. 담양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반겨준 분이 담양뉴스신문의 장광호 편집국장이었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고향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활동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신문 기고를 부탁해 오셨다. 기꺼이 그러마고 하고, 약속한 날짜가 마감날짜에 달한 것이었다. 가족들이 일어날 때까지 다 마치겠다고 초광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제일 막내가 일어나 큰아빠 뭐하세요 하며 장난을 걸어온다. 아들도 일어나서 베란다에서 일하는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둘러 원고를 마치니 속이 후련하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해야 할까.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다 보니 어쩔 때는 내가 왜 이리 사서 고생인가 싶기도 하다.
청령포.

 서둘러 식탁을 가서 아침을 함께하고 나섰다. 원래 마지막 날은 뿔뿔이 흩어져 각 가족이 내키는 대로 가기로 했는데, 아들과 딸을 위한 역사기행을 한다는 내 말에 같이 합류한다고 끼어든다. 다들 유의미한 시간이긴 하지만 땡볕 더위라 쉽지 않다고 만류해 본다. 하지만 다들 괜찮다고 함께 하자고 한다. 그럼 코스는 영월에 왔으니 당연히 단종을 만나기 위해 청령포의 유배지와 릉을 들르며 조선의 역사를 보고, 차를 이동해서 신라가 남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항전했던 적성과 단양적성비를 보고, 마지막으로는 고구려가 남하하여 이 일대를 장악한 중원 고구려비를 보는 것으로 하자했다.

 가족들의 합의하에 청령포로 간다.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곳에 단종의 유배지가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쳐진 곳이고 한 면은 절벽이 있어 육지안의 섬과 같은 곳이 청령포다. 훗날 정암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귀양을 온 것도 능주의 지형이 강으로 둘러쳐진 육지속 섬과 같아 고립하기 좋은 곳이었듯이. 육중하게 자라난 소나무 숲 그늘 아래 단종의 처소가 있었다. 제 아무리 풍광이 빼어나더라도 왕에서 노산군으로 폐위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했던 이의 심정에는 그마저 사치였을 것이다. 결국 강요된 자결을 하게 된 그의 시체를 호장인 엄홍도가 메고 가 가매장을 한 곳이 지금의 장릉이라고 하는 곳으로 연결된다.
단종 유배지.
 
▲청령포, 아름답고 고립된 유배지
 
 한밤중에 가다보니 노루가 놀라 튀어간 곳에 매장을 했으니 그것도 노루 장(獐)자요. 훗날 신원이 회복되어 묘지명에 씩씩할 장(壯)자를 붙여 장릉이 되었던 역사를 이야기하며 숲길을 거닐었다. 이제 배를 타고 나와 장릉에 이른다. 저 멀리 걸어갈 생각을 한 아이들이 짜증을 낸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려주고 한편으로는 나의 과욕이었나 반성도 하면서 장릉에 섰다. 역사의 현장에 선 나의 감회와 달리 아이들 얼굴을 보니 어여 돌아가야 할 생각 밖에 없다.

 아이들을 다독여 이번에는 단양의 적성이라는 성곽을 찾는다. 진흥왕이 세운 적성비를 보고 적성의 성곽을 잠시 거닐어 본다. 여기도 아이들에게는 곤혹스러운 등산길이었다. 어제까지가 최고였다. 가면 갈수록 아이들은 짜증이다. 내 가족이 그러리라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다시 차를 타고 마지막이란 것을 강조하며 중원의 고구려비를 찾았다. 월요일의 사적지는 문이 닫혀 있었다. 당직을 서는 분에게 예전에 노지에 있었는데 웬 컨테이너를 놓았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여기가 소관부서가 아니라며 말도 안 맞춰 준다. 낭패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이만큼 했으면 됐다 싶어 보인다. 심일 간의 여정은 그렇게 만족도 높은 체험과 만족도 빵점인 배움 여행으로 클로징했다.
장릉.

 돌아보면 이렇게 매년 모여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과유불급이 아닌가 싶은 여행. 급한 데로 여러불 끄면서 다녀왔지만 청명한 날 아이들 데리고 다시 한 번 역사여행은 떠나 볼 궁리를 해 본다. 여행을 도와준 엄태석PM과 박달재수련원의 이종진 관장님께 감사드린다.
전고필<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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