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 중심으로 중산골이 불타가고
제주절도 소외 받아강 시신으로 뒤덮였구나

▲ 오름에서 보는 중산간과 저 멀리 눈 쌓인 한라산.
 저기 오름의 능선들이 보인다. 설문대 할망의 헤진 치맛자락에서 떨어져 삼백예순 개의 등선을 이루는 오름은 육지의 시선으로는 그저 깔그막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인의 눈에는 그곳이 생존의 지붕이고, 사냥터이자, 목축의 전진기지이며, 이승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그들을 받아주는 영혼의 안식처였다.

 오름이 본격적으로 육지 것들인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물론 그 전에 산굼부리 분화구와 같이 저명한 관광지도 있었지만 기껏 데크를 놓고 저 안에 아열대의 식물과 온대의 식물이 함께 자라고 있는 굉장히 독특한 식물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성찬으로 그쳐버린 시절을 다 지내고서다.

 제주인의 눈으로 오름에 대한 탐사보고서가 나오고, 하루 몇만명씩 쏟아져 들어오던 관광객들이 제주를 다 섭렵하면서도 무언가 아심찮아 또 찾았을 때 오름은 제주여행의 새로운 탐방지로 떠올랐다. 거기에 진짜 오름다운 오름을 렌즈를 통해 보여준 김영갑 선생님의 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갤러리 두모악에 가면 생애를 걸고 길어올린 제주의 바람과 오름을 만날 수 있으며, 신화의 땅 제주 또한 만날 수 있기도 하다. 이번 발걸음은 용눈이지만 그 곁에 있는 다랑쉬 오름도 지나칠 수 없어 우린 해찰을 감행한다.
 
 ▲용눈이오름, 제주에서의 나의 성지
 
 잃어버린 다랑쉬마을이라는 표지석에서 생각해본다. 2002년 ‘도서출판 각’이란 제주에 천착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다랑쉬굴의 슬픈노래’라고 하는 책을 통해 접했던 정보는 그랬다. 마을에 말을 키우는 난장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흩어다니는 삐라를 주워 담배쌈지를 삼았는데 그만 토벌대에게 걸려서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맞아 죽었다는 일부터, 11명이 굴로 피난을 갔는데 굴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갈기다 마침내 입구에 불을 질러 연기를 밀어넣고 질식사에 이르게 했다. 1948년 12월18일의 일이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1991년 12월22일 제주 4·3연구소 조사팀은 그 참혹한 현장을 찾아낸다. 11구의 유골과 유적이 있었고, 9살된 아이와 부녀자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이분들을 합동묘소로 모시고자 했으나 당국은 유골을 화장하고 바다에 뿌려 그 기억을 감추고자 했었다. 다랑쉬굴이 보여주는 것은 제주의 여느곳에서도 비슷하게 이뤄진 일과 매일반이었다. 그런 슬픔의 마을과 그것을 지켜보는 다랑쉬오름을 보며 아픔의 눈물이 글썽이자 애꿎은 하늘만 본다. 그러다 맞은 편 뜨락에 무럭 무럭 자라는 겨울 무에 눈을 맞췄다. 한겨울의 고난을 이겨내고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듯한 무가 그 자리에서는 고마웠다.

 다시 걸음은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길이 이전에 비해 많이 변형되어 있다. 오름 아래 목장이 운영되며 탐방로가 개설된 듯 했다. 아마도 모두 사유지가 아닐까 싶어지는데, 소유주의 양해가 아니면 오르지 못할 오름으로 보여졌다.

 세 개의 분화구로 형성된 용눈이 오름은 내게 너무 익숙한 곳이다. 제주를 와서 둘러볼 시간이 없으면 이곳만이라도 들러야 비행기 삯이 안아깝다고 여겨지는 나름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초롬하게 등성이를 겹쳐 이뤄지는 실루엣의 율동감이 좋고, 그 사이로 빼꼼하게 잠실경기장을 연상하게 하는 다랑쉬오름의 산정이 보이는 게 좋고, 저기 잡힐 듯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산일출봉과 그 바위벽을 때리고 있는 파도의 포말이 보여져 좋다. 게다가 한라산까지 이어지는 오름들의 너울이 좋고, 눈쌓인 정상의 모습이 보일 때는 그야말로 제주 오름중 엄지척 할 수 있는 곳이 용눈이란 것에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생략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보려고 오름을 한바퀴 돌며 순한 맞바람의 앙탈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름과의 조우를 마치고, 시장기를 느끼며 하마터면 베어질 뻔한 비자림로의 편백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제주시내로 향했다. 작년 이 비자림로를 지키려고 광주의 영산강유역환경청에서 30여일 동안 농성을 했던 그래서 겨우 지켜낸 그 길. 부디 담양의 메타세퀘이아 가로수 길처럼 영원히 사랑받길 바라며.
 
 ▲용두암, 바닷가, 해산물, 소주…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첫날 나 때문에 포기했던 보말죽이 나오는 탐동의 식당이었다. 제주의 해녀가 아닌 해남1호라고 하는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보말죽과 성게를 섞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마치 오키나와의 왕소라처럼 커다란 왕보말을 보니 우리에게도 이런 바다생물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게 좀 아쉬웠다. 8년 전 통영의 매물도를 찾았다가 만났던 왕벗굴(지역에서는 꾸리라고 부름)을 만난 것처럼 신기하기도 했다.
용눈이 오름에서 보이는 다랑쉬 오름.

 맛있게 늦은 점심을 마치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대구에서 늦게 합류할 벗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간은 얼추 한 시간이 남았다. 그렇다면 그 시간도 소중히 사용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용두암으로 가자고 했다. 용두암 바닷가에 해녀들이 물질을 해온 다양한 해산물에 소주를 파는 곳을 놓칠 순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닷가에 둘러앉아 해삼과 소라를 시켜 소주 한잔을 들이킨다. 저기 비상할 듯한 용의 머리가 있고, 그 뒤편으로는 커다란 호텔이 시야를 가리긴 하지만 그 부분은 편집하고 흑룡의 비상만 바라보며 또 한잔을 들이킨다. 족발을 시켜 먹으며 마을의 이야기를 나누는 늙으신 해녀 분들과 그보다는 한참 젊어 보이는 해녀들의 응수가 정겹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기꺼이 용두암 탐방로의 한켠에 앉아준다. 여유가 있을 때는 성신일출봉의 해녀작업장, 용머리해안의 해녀작업장 세 곳 풀코스를 다 들를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용두암 이곳만 들러도 흡족한 처지가 되었다.

 학교의 일 때문에 늦은 친구와 조우했다. 먼저 오늘 밤의 숙소를 찾아 이호해수욕장 쪽으로 차를 향했다. 아까 오키나와를 연상했는데 숙소 이름이 요기나와라는 곳이었다. 기시감이었을까. 여튼 바다가 환히 보이면서 편한 공간이었다.

 여장을 풀고 다섯이 된 제주 허 씨 일행은 후배가 일러준 식당을 찾아 나선다. 서울에서 문화관련 일을 하던 후배가 제주에서 두해 정도를 머물면서 발굴한 집이라고 손꼽으며 자랑하던 영자포차가 그 집이었다. 왕보말죽을 많이 먹은 탓에 회를 시키고도 젓가락질에 서두름이 없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온 친구는 왕성한 것에 비해 먼저 온 넷은 조금은 심드렁해진 탓일 것이다. 여튼 입담이 백남봉 수준인 새 친구의 풍성한 입 놀음에 한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저녁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준비한 여러 안주를 가지고 제주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고 싶지 않게 보냈다.

 ▲와흘본향당 심방의 사설 기록하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은 새로온 친구를 빼곤 일어나지 못했다. 먼저 일어난 친구가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컵라면을 끓여 테라스에 앉아 먹는 모습에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 일어나는 아침은 불우했다. 다들 기상하고 씻고 나니 열시쯤, 조금은 서둘렀다.

 오늘은 와흘본향당의 신과세제를 만나야 하는 시간인 탓이다. 나름대로 나는 이번에는 심방의 사설을 녹음해 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제주어 즉, 제땅말로 하는 저 언어에 녹아있는 그들의 삶을 신의 대리인은 어떤 형태로 고하는지 궁금했다.
와흘본향당의 신과세제를 만나야 하는 시간.

 11시 무렵 첫날 미리 가 보았던 와흘본향당에 이르렀다. 주민들과 어머님들, 심방과 악사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당내에 가득했다. 심방은 이미 기운을 숭숭 뿜어내고 있었다. 눈에는 광채가 있었으며 몸짓에는 절도가 있었고, 사설에는 슬픔과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희망이 교차했다.

 내용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보니 제주 절도라/ 와흘 고을 아니열서/ 한라산에 중심으로 중산골이 불타가고/ 저 제주절도 소외 받아강 시신으로 뒤덮였구나/ 그때 4·3사건에 살아나제 여영/ 산으로 도망갔당/ 죽창으로 인간 총명 허였구나/총칼로 억압받아/인간 총명 어였구나/아까운 어른 아이 할것없이/이젠 71년이 넘어섰구나/애기들도 총쏘아 가고/죽창으로 찔려가 가난/어멍 한번 소리 못하고/아방 한번 소리 못하고/형제간 얼굴 못보아/굴에서 불탄가던/죽어가던 /이런 풍경이로구나 ∼ 중략 ∼

 당집으로 육지신네들/철부시 몰라던/이것 돼지고기 도새기고기 가져 드렸다가/부정하였구나/놀랑해여 /와가 가닥 빌어 가당/당집으로 한제님은 괘씸하다/신망조회 불러즈듯/없는 불꽃이 일어나고 연꽃이 일어나/나무가 타가고/자손들은 /당집을 고난 공덕이 상처하여/어떤허꼬 어떤하고 마음 졸여주게 하던/요런 인심들이로구나/오늘은 /자손들 마다 하 가지 가지/꺽어지게 하던 요런 인심들/이거 오늘은 떨어진 운명하신/삼천이른 여덟 지하본명이랑/옹기주작 껍데기 /많이 많이 드사이다. 이런 내용을 노래하고 있었다.
 
 ▲사설 속 4·3의 응어리
 
 본풀이인즉 마을의 설촌 내력부터 오늘 현세까지를 이야기하고 마을의 화평과 생산증대를 노래하는 것이라 저 사설 안에서 나는 다시 4·3의 응어리와 이 당집이 가진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다르게 변용하는 육지의 무당들이 저지른 잘못을 읽어본다.

 본디 이집은 자식 넷을 가진 서정승 따님애기와 금백조의 자손인 백조도령이 혼인하여 좌정한 곳이다. 한데 임신한 따님애기가 돼지고기가 먹고 싶은 걸 참을 길 없어 돼지털을 뽑아 냄새를 맡았는데 한라산으로 사냥을 다녀온 백조도령이 이를 용서하지 않아 중앙재단에서 동쪽 모퉁이로 부인을 쫓아낸 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터부가 있는 곳인지라 제당에는 돼지고기가 오르지 못하는데 이를 모르는 육지의 무당이 이곳에 돼지고기를 올리고 굿을 하는 바람에 당산나무에 불이 붙고 마침내 쓰러져 버렸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의 서사를 인간의 부정으로 몰아가고 이를 용서하고 오늘 차린 제물을 드시고 복을 바라는 기원의 제의에 나도 젖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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