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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 길을 묻다]알베르 카뮈 ‘이방인’
부조리함, 삶은 과연 무의미한가?
박선주
기사 게재일 : 2014-09-15 06:00:00
▲ 뭉크의 `절규’.

 엄숙한 시간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고 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릴케

 

 ‘엄숙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 국가, 신념, 이념, 사상 등 보통 엄숙하다는 것에 어울리는 말들은 이처럼 추상적인 가치들이다. 하지만 릴케가 노래하는 ‘엄숙한 시간’이란 ‘까닭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가장 실존적인 삶의 시간들이다. 우는 것, 웃는 것, 정처 없이 걷는 것, 죽는 것들은 추상적인 위대한 가치들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고 까닭 없는 것인가? 이 까닭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그렇지만 한 개인에게는 얼마나 심각한 사건일 것인가? ‘인간’이라는 추상성 안에는 울고, 웃고, 걷고, 죽는 가장 구체적인 사건들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으며 나에게는 그것들이 더 엄중한 일인 것이다.

 

 엄숙한 것에 엄숙함을 표하지 않은 죄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불량스러운 반항아이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당시에는 누구라도 그의 행동에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 냉혈인간,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즐기는 패륜아, 살인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범죄자인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뫼르소의 표면적인 죄는 살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방위의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살인이기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충분하다. 그것보다도 사람들은 뫼르소가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 줄 가치, 규율, 제도, 윤리 등을 위반했기에 위험한 인물로 간주한다.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그가 근신하지 않았던 점, 그가 뉘우치지 않았던 점이다. 그는 사회가 정해놓은 엄숙한 것들에 대해 엄숙함을 표하지 않은 죄로 자신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추방되는 이방인이 되고 만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니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의 감정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그가 느낀 슬픔의 크기와 양을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어떻게 재단할 수 있을까? 뫼르소가 아닌 우리는 이 세계로부터 온전히 이해받고 있기나 하는 것일까? 뫼르소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그를 추방시켜버린 체 모른 척 할 수만은 없다. 바로 이 소설이 던져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와 반항

 

 ‘이방인’은 프랑스의 작가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로 평가 받으며 세계적인 실존주의 문학 선풍을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카뮈의 작품을 이해하는 두 개의 키워드는 ‘부조리’와 ‘반항’이다. 카뮈는 인간을 합리적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존재라고 보고 있다. 반면에 세계는 그런 인간 존재의 의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모순이 빚어지고 이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 바로 ‘부조리’이다. 결국 인간은 이런 부조리 상황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조건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또한 인간이야말로 부조리에 굴복하여 자살하거나 신에 의지하는 대신 ‘반항’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포스처럼 언덕 아래로 돌이 굴러 떨어지는 상황(부조리)이 아무리 계속돼도 다시 언덕 위로 돌을 밀어 올리는 행위(반항)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카뮈가 생각하는 부조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또한 인간 존재의 무상성(無償性)을 자각한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작품 속에 묘사된 그가 그러한 의식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뫼르소가 처한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했다고 해서 뫼르소가 슬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슬프다는 것을 애써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뫼르소의 행동은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우발적인 살인이 있은 후 뫼르소는 살인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그 순간 자신이 강렬하게 느꼈던 심리적인 정황으로서 ‘태양이 너무 눈부셨다’고 말한다. 피의자의 죄의 유무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하는 법정에서는 그의 모호한 답변은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검사가 재구성한 자신의 범죄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남의 일인 듯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그저 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권하는 신부의 말도 듣지 않음으로써 회개하지 않는 불쌍한 죄인이 되었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죽임을 당해야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온통 문제가 될 뿐인 행동들을 그는 속수무책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하지 않음’이 답답하게 느껴지며, 그의 관계 능력의 부재를 탓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모든 세계는 이방인을 만든다

 

 하지만 뫼르소를 다른 쪽으로 한 번 해석해보자.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다. 물론 타인과 사회에 대한 배려와 예의는 조금도 없지만, 타인의 눈에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걱정하지 않는 그는 순수하다. 그런 그가 세계와 자신의 부조리함을 마주했을 때, 시지포스처럼 반항한다. 복종과 반성을 요구하는 것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죽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현실 속에서, 매 순간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뫼르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한 개인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과연 같은 것일까? ‘우리’라는 말 속에는 진짜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또는 ‘우리’는 왜 무엇인가를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되짚어 가다 보면 문득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고유한 나’와 ‘우리’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이며 사회이며 거대한 체제이다.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나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려 한다. 그 때에 발생하는 것이 소외이며, 부조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계는 이방인을 만든다. 세계와 맞서 ‘진정한 나’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추방당해야 했던 이유는 부조리한 삶의 상황에 직면에 묵묵히 스스로의 기치와 의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사람도 이방인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무수한 목숨들이 귀중하지 않은 것처럼 가치 없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누군가는 질문한다. 민족과 국가가, 또는 그 어떤 선(善)이 한 사람의 인생, 한 사람의 삶과 죽음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라고. 그 질문이 소설 ‘이방인’의 뫼르소를 탄생시켰다. 역사는 개인을 기록하지 않는다.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힘을 기록할 뿐이다. 그 질서에 질문하는 사람이 이방인이다. 획일화된 삶의 방식을 쫓지 않고 삶의 다양성을 고민하는 이들도 이방인이다. 나의 개성과 창의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이방인들은 누구인가? 인류 역사의 원형인 신화 속에도 이방인은 존재한다. 세계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조화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류 역사는 아폴론적 세계를 중심에 세우고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배척하는 가운데 문명의 진보를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 합리성, 과학성, 효용성 등이 더 힘을 발휘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해가는 역사 속에서 그와 반대되는 것인 감성, 무질서, 자유, 광기는 배척당한다. 이것이 지배자의 속성이다. 디오니소스는 이방인의 원형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감성이 창조한 예술의 세계에도 지배적 질서가 존재한다. 예술도 정치성, 사회성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예술혼은 따라서 위험하다. 철저하게 정치, 사회, 시대의 논리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 예술가들은 이 논리 앞에 맞서 실존적 고민을 할 것이다. 거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예술혼을 펼치지 못하고 배척당했던 이방인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시대와 화합하지 못했거나 시대를 앞서 가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다 추방당한 이방인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 한 시대의 질서로 규정된 것들도 과거에는 이방인들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신분제도의 변화, 국가제도의 변화, 인권의 변화, 새로운 사상의 출현, 새로운 도구의 출현, 새로운 지식의 출현 등 인류 진보의 힘은 늘 이방인들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이방인들이었으며, 시민혁명을 일으킨 유럽의 부르주아지들도 그 사회의 비주류들이었다. 코페르니쿠스도, 아인슈타인도, 빌게이츠도 한 때는 이해받지 못했던 사고를 했던 인물들이다.

 이쯤에서 슬픔과 외로움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방인’이라는 낱말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고민해보게 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 중 과연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며 해나가는 일들이 몇 가지나 될까? 날마다 공부라는 당면과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자신의 삶에 관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결정지을 수 있을까?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투성이인 이 세계에서 ‘진짜 나’는 왜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이런 모습이 카뮈가 주장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이라면 카뮈가 해결책으로 주장하는 ‘반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숙명처럼 주어진 부조리의 고리를 끊고 ‘실존적 나’가 ‘나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의미한 삶이기에 의미가 필요하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이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밀러의 말이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와 평등, 인권 그리고 다양성의 가치가 인정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여전히 배척당하고, 추방당하는 이방인들은 존재할 것이다. 사회는 항상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갖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빈곤한 사람들은 소외된다. 학벌위주의 사회에서는 학벌이 없는 자가 소외된다. 산업화사회에서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소외된다. 우리는 그들을 소수자, 사회적 약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가야 한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한 사회일까?

 뫼르소는 이해받지 못할 행동을 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의 진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뫼르소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나는 누구에게 이해받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조금 다른 목소리는 과연 들리기나 할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 조차 듣지 않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카뮈는 우리에게 용기 있는 자각을 요구한다. 부조리에 맞서는 반항은 저마다 다르지만, 각자가 빛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건강한 이방인들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가 필요하다.

박선주 <봉선지혜의숲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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