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낱말 안에 `영원의 서’가 있다

▲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경마장의 말’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함민복 `사과를 먹으며’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오직 아삭한 맛과 상쾌한 기분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내게, 사과를 보면서 현재의 사과를 있게 한 만물들의 도움과 얽힘을 상상하는 시인의 사유는 놀랍기 그지없다. 어찌 사과뿐일런가, 미물에서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까지, 이 모든 것들이 태초부터 유기적으로 엮여 전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세계는 낱낱의 개체들 개별 분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길과 관계들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자연은 거미가 짠 거미줄처럼 유연하게 접속하고 확장되는 우주적인 네트워크다.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레 섞이고 이어지는 것처럼 물과 땅은 서로에게 깃들여있고 서로를 침투한다. 그것을 강과 땅이라 구획하고 나누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여기서부터는 강, 여기서부터는 댐, 여기서부터는 바다라 나누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게 인간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지어 경계를 구분했다. 육체와 영혼, 선과 악,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구석기에 수렵과 채집을 위해 유랑하던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눈 이래로 1만년 동안 수많은 낱말들이 탄생했다.

 

 사과를 있게 한 만물들의 도움과 얽힘

 

 나는 백인 혹은 유색인, 여자 혹은 남자, 어른 혹은 아이, 영웅 혹은 범인(凡人)이라는 집합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 나를 무어라 이름붙이지 못하면, 당장 의심의 눈초리와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이름 붙여야만 사유할 수 있는 인간, 이름을 통하지 않으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름붙이기의 능력을 통해 인간은 자연과 자신을 이해하고 이용하고 정복했다. 따라서 이름붙이는 능력은 힘이자 권력이다. 무언가의 이름 즉 낱말을 많이 안다는 것은 여전히 힘이며,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수학을 익히며 책을 읽는다. 그 배움과 가르침의 교육방식이 옳은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혹 기쁨과 힘이 되어야할 지식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까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으련다. 오늘은 다만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낱말은 사유하게 하는 힘이다.

 상상한다. 시인은 어떤 사과를 마주하고 있었을까? `사과가 나를 먹는다’는 마지막 행의 역설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말 좋아하는 것 앞에서 나를 망각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어느새 동 트는 바깥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낀 적이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몰입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든 취미든 대상에 깊이 몰입해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잊는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 똑딱거리며 가는 시계의 시간이란 참으로 인위적인 것이다. 몰입의 시간 혹은 심리적 시간은 찰나가 영원 같고 영겁이 찰나 같다.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새벽 아침 고추모종을 살피러 나온 시골 촌부의 시간도 심리적 시간이며 실리콘밸리의 견고한 건물에서 배양액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의 시간도 심리적 시간이다. 심리적 시간을 가진 사람 앞에는 그만의 세계가 나타난다. 발견과 해석의 세계, 창조적 여지의 틈. 그곳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자는 사과가 나를 먹는 경험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노쇠한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사과는 나를 먹을 것이다. 그렇게 생의 순환은 무한하다. 시인은 사과와 하나 된 몰입의 시간에 사과에게 먹히고, 나는 시에 먹힌다.

 

 몰입할 때 스스를 잊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

 

 때때로 나는 낱말이 `원자’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하나의 낱말은 그 안에 불확실성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의 낱말에는 한 시대, 혹은 한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식이 있다. “사과”하면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리는 둥글고 붉거나 푸른 이미지가 바로 사과라는 낱말의 `핵’에 해당한다. 원자핵의 주변으로는 무수한 전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한다. 하나의 낱말을 응시하며 사람들이 떠올리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바로, 낱말의 `핵’ 주변을 부유하는 `전자’들이다. 시인에게 사과가 생의 순환이라면 나에게 설날 즈음 툇마루에 놓여있던 한 광주리의 사과는 할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나의 `사과’는 당신의 사과와 `핵’은 공유하지만 `전자’는 공유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전자’적 경험은 말이나 글이 되어 당신에게로 가는 동안 에너지를 얻거나 잃는다. 그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낱말이 가진 치명적인 매력이 여기에 있다. 말은 언제나 발화되는 순간 오해와 곡해를 만드는 숙명적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 오해와 곡해만이 아니라 때론 창조적 비약을 낳기도 한다는 것! `사과’라는 낱말은 두 개의 자음과 두 개의 모음에 의해 구성되지만 그것이 가진 뜻과 의미는 발견하는 자의 수만큼 무한하다. 시인처럼 사과에서 생의 순환을 읽을 수도 있고, 뉴턴처럼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 사과라는 낱말의 핵을 감싸고도는 무성한 언어의 전자구름들.

 모든 사물은 세 번 태어난다.

 사물은 세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설계자의 머릿속에서, 두 번째로 사물을 만드는 노동자의 손에서, 마지막으로 이름 지음을 통해서. 사물에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비약이 일어난다. 이름에는 무게도 질량도 없다. 따라서 사물은 이제 머리에서 머리로 이름을 통해 옮겨지고 복제되며 증식해간다. 이름은 사물 없이 사물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매개체다. 낱말로 인해 나는 이 무한한 우주를 뇌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당신을 만나 내가 꺼내놓는 낱말의 향연 곧 문장이 바로 나의 관심사이며 개성, 내 정체성이다. 말이 곧 나다. 나에게 그대의 말을 보여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내가 모든 말들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내가 잊어버린 것들에 의해 내가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보고 들은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면?

 

 사물에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비약이 일어난다

 

 나는…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라는 이 신성한 동사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지구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그러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는 한평생 내내 저녁부터 새벽까지 그 꽃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꽃을 보는 듯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를 기억한다.

 담뱃불 너머로 과묵하고, 인디언 같고, 그냥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얼굴. 이레네오 푸네스.

 -보르헤스전집2 픽션들/민음사

 보르헤스가 경탄과 연민을 가지고 창조해낸 소설속의 인물 푸네스는 기억의 천재이며, 그가 등장하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1887년 푸네스는 산 프란시스꼬의 목장에서 반쯤 길들인 야생마로부터 떨어져 절망적인 전신마비 상태에 빠졌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그의 현재는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버렸다. 푸네스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일들까지 기억이 났다. 그의 지각력과 기억력은 완벽한 것이 되어 있었다.

 푸네스는 포도나무에 달려있는 모든 잎들과 가지들과 포도 알들의 수를 지각했다. 그는 1882년 4월30일 새벽 남쪽하늘에 떠있던 구름들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꿈과 비몽사몽간의 일들을 모두 복원시킬 수가 있었다.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푸네스가 보르헤스에게 한 말이다.

 루소는 말했다. “잊어버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어떤 진리도 알 수 없다.”

 

 낱말 하나에 무수한 차이가 은폐돼 있을 수도…

 

 순간적인 인상들을 무한히 구별하고 무한히 기억할 수 있는 푸네스의 능력은 그에게 은총과 쓰디쓴 환멸을 동시에 맛보게 했다. 사고란, 차이를 잊고 공통점들을 모아 일반화하고 개념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개념화를 통해 다시 세계의 사물들을 이해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네스는 개념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보는 플라톤적 사유를 할 수 없었다. 한 마리의 개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안의 그 모든 순간이 다르게 지각되고 기억되는 푸네스의 뇌는 한 마리의 개가 왜 같은 이름을 가져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계속해서 미세하게 달리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무한히 증식되는 기억 속에서 무한한 이름붙이기라는 거대한 바다에 잠겨 살던 푸네스는 스물한 살에 패울혈로 죽는다.

 언어란 신비하다. 그것이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할 때마저도, 근본적으로 낱말은 추상에 머문다. 동그라미, 오른쪽과 왼쪽, 푸름과 붉음이란 낱말을 사용할 때 인간은 `정도의 차이’를 무시할 만큼 무심하거나 영악하다. 그래서 역으로 낱말 하나에는 무수히 많은 차이들이 은폐되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낱말의 겹과 결이다. `밤’이란 낱말에는 푸네스가 보았던 밤의 차이, 차이, 차이들이 두루마기처럼 말려있는 것이다. 한 점 낱말 안에 `영원의 서’가 있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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