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우리’ 위해, 그때 ‘우리’ 잊지 않을게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기억한다

▲ 영화 ‘해리포터’. 덤블도어는 머리카락에 기억을 담아 펜시브라는 그릇에 저장한다.
 “그러니까 그때가 영식이 결혼할 때잖아. 너 그때 미정이가 사준 갈색 베레모 쓰고 있었고.”

 “아니지. 엄마도 참. 그때는 숙부 칠순잔치 때고. 영식이 결혼은 나 못 갔다니까?”

 “얘가? 영식이 결혼에 너 왔었어! 똑똑히 기억 나구만.”

 “여보, 그때 나랑 결혼하기 전인가?”

 “진작 결혼 했지. 초록색 원피스 입고 왔었잖니. 얘들은 어째 나이 먹은 나보다도 가물가물 하니?”

 “아우, 머리 아파! 아무튼 난 간 기억이 전혀 없네요.”

 “초록색 원피스? 그때는 큰아버님 장례식 아니었던가? 내가 급하게 겉옷 빌려줬던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얘들이. 영식이 결혼식 때가 맞아! 내 기억이 확실해.”
 주문한 불백 4인분이 나오기 전이다. 밑반찬이 깔리고, 어른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하릴없이 콩나물을 집어먹으며 밥상 위의 탁구를 그저 관전한다. 하여튼 맨날 이렇다. 옛날 얘기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서로 자기 기억이 맞다 아니다 티격태격. 속으로 중얼거린다. ‘언제 누구랑 뭘 먹고 입었는지를 놓고 한 시간 넘게 입씨름 할 수 있는 민족은 우리가 유일무이할거야’ 라고.

 뭐 어차피 상관없다. 난 저 대화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으니까.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거나, 아주 갓난아기일 때가 분명하다. 영식인 도대체 누구야? 아차, 분명 나보다 어른이실 테지만. 아무튼 어르신들,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시는 동안 수많은 관혼상제며 각종 행사들을 치러 오신 거다. 그 많은 일들을 세세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겠지.

 근데 과연 저 중에 정답이 있을까?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문득 궁금하다. 이럴 때 펜시브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펜시브’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억을 저장하는 그릇이다. 덤블도어는 머리카락에 중요한 기억을 담아 이 은색의 그릇에 저장한다. 지난 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 그릇 속으로 들어가 그때의 상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저렇게 말싸움 할 일도 없겠지.
 
▶고통·분노·상처의 기억이 더 강렬하다
 
 “니들 기억 다 틀렸어. 난 내가 고생한 일은 정확하게 기억해. 그때 오랜만에 시누들 낯짝 보고 내가 얼마나 열불 터졌는지 아니?”

 할머니의 종지부에 가족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흐음…할머닌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정확히 기억하는 타입이시구나.’ 근데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행복했던 때를 선명히 기억하는 게 스스로 훨씬 이득일 테지만, 우리 뇌는 고통을, 상처를, 분노를, 아픔을 더 강렬하게 기억한다. 하물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들이 이렇게도 각양각색인 걸 보면 기억이란 참으로 나약하다. 문득, 엄마가 살아있었을 때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언젠가 엄마랑 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했었다. 난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난 어린애였고, 세상은 몽글몽글 부드럽기만 했다. 남자애들이 괴롭혀도 엄마 품에 달려가 안기면 그만이었던 때. 희미한 그 시절을 더듬으면 마치 모빌 달린 유모차 안에 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노르스름하고 따스한 증기에 감싸이는 것처럼 편안하다. 특히 오래된 필름 사진들을 볼 때, 포크송가수들의 촌스런 앨범 자켓을 볼 때, 여배우의 버건디 컬러 립스틱을 볼 때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곤 한다. 가끔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말을 했더니 엄만 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자긴 돈을 줘도 절대 그때로는 돌아가기 싫다는 거다. “왜?” 하고 물어보니 대충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때 너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깡 시골에서 너랑 나랑 둘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진절머리가 난다, 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엄만 사회 초년생이었다. 게다가 결혼하자마자 주말부부. 아빠는 도시에서 출판 일을 했고, 보건직 공무원이었던 엄마는 맨날 시골이나 섬으로 발령을 받았다. 답답하고 으스스한 시골에서 일은 힘들지, 앞날은 캄캄하지, 애는 보채지…. 스물 몇 살의 엄마에게 그 시절은, 의지할 곳 없이 모든 걸 그저 버텨내야했던 때였던 거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을 리가 없겠구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솔직히 나도 한 80살쯤 먹고 생을 돌아본다면, 적어도 2017년으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어휴…다시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하구만.” 할머니는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리겠지. 돌이켜보면 엄만 영화도 늘 최신 영화만 봤다. 딱히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없고, 그냥 지금이 그런대로 좋다고 말하곤 했다.
 
▶추억은 정말, 다르게 적힌다
 
 누군 행복했는데 누군 힘들었던 시간…. 이런 날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엄마와 내가 함께 한 21년하고 몇 개월 중에서. 같은 순간을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우리 둘은 매일 매일을 다르게 기억해오고 있었던 거다. 이소라가 노래했듯이, 추억은 정말 다르게 적힌다.

 타임캡슐을 묻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됐을 때였다. 한창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인기를 끌었고, 영화에 나온 타임캡슐이 유행했다. 나랑 친구들은 “우리도 저거 해보자!” 호기롭게 외치고는 각자의 집에서 캡슐에 넣을만한 물건들을 모아왔다. 누구는 어렸을 때 적었던 일기장 몇 권, 누구는 생일에 아빠한테 선물 받은 인형, 누구는 유치원 졸업식 날 선생님이 준 구슬과 꽃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애들이다. 아니, 타임캡슐 안에 들어갈 물건들은 적어도 당사자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하지 않은가? 예를 들면 놀이터에 옹기종기 앉아 롤링페이퍼를 쓴다던가. 그렇게 막 태어난 생생한 감정들에 시간이 쌓이면서 점차 추억이 발효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열어 보았을 때, 묘하게 피어오르는 기쁨과 새롭게 다가오는 추억들…. 이런 게 타임캡슐의 의미지 않나? 공감도 안 되는 본인들만의 추억을 파묻어서 대체 뭘 어쩌자고.

 하지만 그때 우린 그냥 뭔가 ‘묻는다’는 것에 심취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문구점에서 파는 3000원짜리 분홍색 타임캡슐을 사서, 각자의 물건들을 넣고 코끼리 미끄럼틀 아래에 묻었다. 그리곤 ‘십년 뒤에 찾으러 오자’는 뻔한 대사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었다.

 커가면서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아…그때 우리가 했던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구나’ 생각하곤 했다. 애들이랑 그 얘기를 할 때면 웃기 바빴다. “대체 우린 뭘 한 거야?” 타임캡슐이란 단어는 내 생애 제일 웃긴 말이 돼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안타까운 건, 캡슐 안의 물건들에 대한 추억 자체가 몽땅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분명 소중한 거였던 것 같긴 한데…. 뭐였더라?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봐도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차라리 곱게 집에 놔뒀더라면 힘들 때 가끔씩 꺼내보고 위로받기라도 할 것을 괜히…. 아직도 그 미끄럼틀 밑에 잠들어 있겠지? 아무튼, 우리의 ‘타임캡슐 대작전’은 각자의 추억을 버리는 행위였던 것으로.
 
▶호화로운 장례식이 고인을 위함일까?
 
 최근에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재키’라는 영화를 봤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전기적인 영화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당시 영부인이었던 재키의 모습을 그린다.

 대통령이 퍼레이드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다.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재키는 바로 옆에서 남편의 죽음을 목격하고,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다. 하지만 슬픔을 달랠 새도 없이 그녀는 의연하게 장례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더 이상 퍼스트레이디가 아닌 재키. 혼란스럽고 힘든 상황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야말로 남편의 시대를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이 틀렸어요.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야 해요. 모두 잭과 함께 행진할 거예요. 사람들 기억에 남도록, 아름답고 큰 행렬로…. 이럴 기회도 마지막이에요.”

 재키는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남편을 역사에 제대로 새기기 위해 성대하고 아름다운 장례식을 연출한다. 짧지만 빛났던 순간이 모두의 머릿속에 영원히 남도록. 누군가 기억은 의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이토록 깊게 고민해본 일이 있나? 실제 인물들에 대한 평가나 당시의 역사적 팩트같은 건 사실 잘 모른다. 그냥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재키에 비하면 내가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얼마나 어리숙한 지를.

 며칠 전 꿈엔 오랜만에 엄마가 나왔다. 엄마의 표정은 어딘가 맘에 안 들고 못마땅해 보였다. ‘너 날 제대로 기억하고 있긴 한 거니? 이래봬도 내가 네 엄마였단다, 이것아.’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엄마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무신경한 딸이었던 나는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것들을 어느 순간 하나 둘 잃어버렸다.

 장례를 치르고 몇 달 뒤, 난 핸드폰 앨범을 정리했다. 아끼는 사진들 20장 정도만 남겨 컴퓨터로 옮기고 휴지통을 싹 비웠다. 며칠 뒤 사진을 찾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usb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야말로 멘붕. 몇 십만 원을 들여 하드를 맡긴다 하더라도 제대로 복구가 될지 미지수였다. 며칠간 마음이 몸살을 앓았다. ‘난 바보 머저리야…’ 자책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마음의 고통은 점차 사그라졌다. 사진에 담긴 엄마의 얼굴도 딱 그만큼 희미해졌다.
 
▶ 기억은 나약하지만, 방치는 어리석은 짓
 
 추억에 대한 나의 태도는 한참 무신경하고 게으르다. 타임캡슐 사건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난 그저 소중한 추억들을 무턱대고 파묻어버린다. 그렇게 묻은 기억들은 정작 내가 절실히 원하고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없다. ‘어디쯤 묻었더라?’ 간신히 찾아서 다시 파보아도 그것들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썩어있다. 가슴 아프고 속상해도 대체 누굴 탓한단 말인가, 모두 내 책임인데.

 “나중에 깨달았죠. 그 모든 허식과 제가 장례식을 위해 요구했던 것들이, 잭이나 잭의 유산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걸…. 그건 저를 위한 거였어요.”

 훗날 재키는 이렇게 말한다. 떠난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들은 실은 남겨진 이들을 위함일 테지. 다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린 그들을 제대로 기억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재키처럼 추억을 조각내고 새로이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소중한 기억들을 방치했지만, 사실 그건 앞으로의 내 삶을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니었다.

 어차피 사람이 매 순간을 영상 찍듯 세세하게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펜시브같은 게 진짜로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같은 순간을 함께 해도 서로의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기억이란 이리도 나약하다. 하지만 그걸 방치하는 건 더 어리석은 짓이다. 썩어버리기 전에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들을 움켜쥐어야 한다. 떠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남겨진 나를 위해서. 바보 같아도 이게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방식이기에.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2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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